파주에서 쉬고 있는 조선시대 여류 문학가들: 신사임당, 홍랑, 이옥봉 등등


​파주에는 이래저래 한두 번 또는 그 이상 그 이름을 들어본 유명 여인들의 묘가 꽤 있다.

이들은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권력층에 속했거나 밀착한 이들이고 또 하나는 그와는 거리가 먼 이들이다. 전자에는 정난정,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 영조의 후궁과 딸들, 그리고 한명회의 두 딸들로 왕비로 추증된 이들의 묘가 이에 속한다. 후자에는 신사임당, 홍랑, 이옥봉이 속하고 이름 표기에서 여류 문인 매창과 헷갈리게 하는 이매창(율곡의 누나)이 있는가 하면 조선시대 최초의 모자(母子) 미라의 주인공으로 주목을 받은 성명 미상의 파평 윤씨 여인도 있다.

오늘은 뒤의 그룹인 여류 문학가들만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홍랑의 묘

교하면 청석초교 길 건너 청석마을 뒤 산자락(교하읍 다율동 519-7)에는 특별한 묘비가 서 있는 묘역이 있다. 시인홍랑지묘(詩人洪娘之墓)라 적힌 묘비가 그것이다.

<시인 홍랑지묘 비석>

묘역에는 그녀의 시를 새긴 홍랑가비(洪娘歌碑)라는 시비도 있어서, 그녀를 두고 두고 기리는 아름다운 모습이 지금도 여전하다.

<홍랑가비>

이 홍랑의 묘는 정실이 아님에도 사대 부가의 문중 묘에 모셔진 최초의 사례인데, 거기에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홍랑과 최경창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후손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홍랑은 교과서에도 나오는 아래의 시조를 지은 이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자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곧 나거든 나인가도 여기소서


생몰년이 불명한 홍랑은 조선 선조 때의 기생이었다. 그것도 함경도의 관기. 그럼에도 그녀의 이름이 후세로 전해지고 후손들에게도 존경을 받으며 사랑했던 정인의 묘 아래에 묻히게 된 데는 아래와 같이 사연이 있어서다.


홍랑의 정인, 곧 고죽 최경창(1539~1583)은 북평사로 제수되어 함경도 경성으로 가다가 자신의 시를 읊는 관기 홍랑을 만난다. 당시 고죽은 삼당파 또는 팔문장으로 불리던 유명 시인이었다. 그렇게 만난 뒤 둘은 꿈같은 시간을 보냈으나 최경창의 관직이 바뀌어 한양으로 떠나게 되자 홍랑은 함경도 주민이 넘을 수 없는 쌍성까지 따라와 작별을 하고 돌아갔다. 그 뒤 최경창이 병석에 누웠다는 말을 듣자 7주야를 걸어 한양까지 와서 극진히 간호했다. 국상 중에 함경도 기생과 살림을 차렸다고 조정에 알려져 최경창은 파직되고 홍랑은 홍원으로 돌아가는데, 그때 고죽은 다음과 같은 시 한 편을 홍랑에게 준다. 그래서 시 제목이< 贈洪娘詩(증홍랑시: 홍랑에게 주는 시)>로 남았다.


相看脈脈贈幽蘭(상간맥맥증유란) 서로를 애처로이 바라보다 난을 준다

此去天涯幾日還(차거천애기일환) 이제 가면 하늘 끝 언제 또 오나

莫唱咸關舊時曲(막창함관구시곡) 옛 함관령 그 노래 부르지 마오

至今雲雨暗靑山(지금운우암청산) 지금은 비구름 속 어두운 청산


그 뒤 최경창이 45세로 사망하자 홍랑은 스스로 용모를 훼손하고 3년간 묘소 근처에서 지내며 시묘살이를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경창의 글들을 짊어지고 피란 길을 전전하다가, 전후 그의 글을 해주 최씨 가에 전하고 최경창의 무덤 앞에서 숨졌다.


이러한 홍랑의 지고지순한 사랑과 헌신에 감동한 후손들은 그녀를 최경창의 묘 아래에 묻는 것으로 보답했다. 아름다운 로맨스에 어울리는 파격적인 대우였다. 조선 중기, 당시에는 정실이 아니고는 사대 부가의 문중 묘에 모셔지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조선시대에 사랑하던 남녀의 시가 시비의 앞뒷면에 함께 새겨져 있는 것도 최초의 일이다. 홍랑의 묘비에 시인이라는 호칭부터 매단 것에서도 후손들의 따뜻한 맘씨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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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아래가 홍랑의 묘. 그 위쪽에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가 있다>


신사임당의 묘


신사임당(1504~1551)에 대해서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파주가 낳은 천재 율곡 이이의 모친으로 전 세계를 통틀어 모자간의 두 사람이 동시대의 화폐 도안에 채택된 사례가 없는데, 신사임당은 현재의 최고액권에 등장한다. 아들이 아무리 빼어나도 모친을 아들보다는 위로 모시기 위함일는지.


신사임당의 시댁이 파주다. 남편 이원수의 본향이 파주의 율곡리[밤골]이고 이이의 호 율곡도 여기서 나왔다. 율곡의 기념관이 강릉에도 있는 것은 신사임당의 친정이 강릉이고 이원수가 딸들뿐인 처가로 데릴사위로 들어가서였다. 가세 또한 처가 쪽이 훨씬 나았다. 현재 보물 165호로 지정돼 있을 정도의 대저택인 오죽헌이 바로 신사임당의 친정 집이었다. 부친 이원수와 모친 사임 신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난 율곡은 6살 때까지 외가에서 지내다가 파주로 왔다.


그때 강릉을 떠나면서 신사임당이 친정을 그리워하면서 지은 아래의 시가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으로 ‘대관령을 넘어서 친정을 바라보다’라는 뜻이다.

 

慈親鶴髮在臨瀛(자친학발재임영) 학발의 자친은 임영에 계시는데,

身向長安獨去情 (신향장안독거정) 나 홀로 장안 향해 가는 심정.

回首北村時一望 (회수북촌시일망) 고개 돌려 때때로 친정을 바라보니,

白雲飛下暮山靑 (백운비하모산청) 흰 구름 이는 아래 저녁 산이 푸르구나.


이 작품은 현재 대관령 휴게소 한 편에 사친시비(思親詩碑)를 세워 크게 기려지고 있다.

<대관령 휴게소에 세워져 있는  사친시비>

신사임당은 시서화에 두루 능했던 천재적인 종합 예술가였다. 하지만 실생활에서는 남편 때문에 속깨나 끓였다. 부부 사이도 좋지 않았지만, 남편의 재능도 문제였다. 시험을 보는 족족 9번씩이나 장원에 올라 ‘구도장원공(구度壯元公)’으로도 불리는 아들과는 달리 이원수는 나이 40줄에야 겨우 과거 초시에 합격하고 음서(蔭敍. 고려‧조선 시대에, 공신이나 전ㆍ현직 고관의 자제를 과거에 의하지 않고 관리로 채용하던 일) 덕택에 말단급인 수운 판관직을 시작으로 관직에 나갔다. 판서에까지 올랐던 아들에 비해서는 한참 아래였다. 그래서 죽은 뒤에도 아들보다 낮은 대우를 받았다. 아들 율곡의 묘보다도 한참 아래에 묻힌 건 그 때문이다.


신사임당의 묘는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5-1, 사적(史蹟) 525호인 '이이유적지' 내의 가족 묘역 중 정중앙 상부에 있다. 맨 위가 율곡 부부의 묘, 그 아래가 장남 부부의 묘이고 그 아래가 신사임당 부부의 합장 묘다.

율곡의 가족 묘소. 맨 위가 율곡 부부, 그 아래가 형 부부, 맨 아래가 부모 합장묘.


이옥봉(李玉峰)의 묘


이옥봉은 오늘날의 일반인들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시인이다. 하지만 그녀의 시절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시를 읊조리는 사람들 모두에게 널리 알려져 있던 아래의 명작 <몽혼(夢魂)>의 주인이다.


<몽혼(夢魂)>


近來安否問如何(근래안부문여하) 안부를 묻노니 요즘 어떠신지요?

月白紗窓妾恨多 (월백사창첩한다) 달 밝은 창가에 저의 한이 많습니다.

若使夢魂行有跡(약사몽혼행유적) 만약 꿈속의 혼이 발자취를 남긴다면

門前石路已成沙(문전석로이성사) 님 계신 곳 문 앞 돌길이 모래가 되었을 거예요


이것은 그녀의 남편 조원을 그리워하며 쓴 시인데 특히 맨 마지막의 ‘門前石路已成沙[문전석로이성사. (님 계신 곳) 문 앞 돌길이 모래가 되었을 거예요]’라는 구절 앞에서는 당시의 모든 문인들이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생졸년이 미상인 이옥봉은 당시의 여류 문인들 모두가 그랬듯이 매우 사연이 많은 여인이었다. 양녕대군의 고손자인 자운(子雲) 이봉(李逢, 1526~?)의 서녀로, 뒤에 스스로 운강(雲江) 조원(趙瑗, 1544~1595)의 첩이 되기를 간청했고 그걸 이뤄냈다. 이옥봉이 시를 쓰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겨우겨우 애를 써서. 당시 서녀는 정실부인이 될 수도 없었고, 남편인 조원은 여인이 시를 쓴다든지 하는 걸 몹시 싫어했다.


시집을 간 뒤 한동안은 남편의 말을 지켰는데, 어느 날 글을 모르는 이웃 여인이 당한 억울한 사연, 곧 그녀의 남편이 소를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혀 있다는 말을 듣고는 시 한 수를 써 주었는데 그 시 덕분에 여인의 남편은 무죄 방면되었지만, 이옥봉은 약속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남편으로부터는 혹독한 벌을 받게 된다. 즉, 남편은 그 뒤로 이옥봉을 찾지 않는다.


이웃 여인을 위해 써 준 작품이 바로 아래의 <위인 송원(爲人訟寃)>인데, 의역하자면 ‘타인의 억울함을 호소함’쯤 된다. 시구 중 견우(牽牛)라는 표현은 견우직녀의 그것도 되지만 ‘소를 끌고 간다’는 뜻도 된다. 즉 소를 훔쳤다는 건 앞뒤가 안 맞는 얘기라는 걸 빗댄 표현이다. 이 시를 건네받고 죄인을 방면해 준 사람이 당시의 파주 목사였다.


洗面盆爲鏡(세면분위경) 얼굴을 씻는 동이로 거울을 삼고

梳頭水作油(소두수작유) 머리를 빗는 물로 기름 삼아도

妾身非織女(첩신비직녀) 이 몸이 직녀가 아닐진대

郎豈是牽牛(낭기시견우) 낭군이 어찌 견우가 되오리까?


이 사건 뒤로 내쳐진 옥봉의 행방은 묘연해진다. 오랜 세월이 흘러 중국의 귀주 앞바다에 뒤집힌 조각배 하나가 떠올랐는데 건져내고 보니 그 아래에 온몸을 종이로 휘감고 죽은 여인이 나왔고 거기에 ‘조선의 승지 조원의 부실(副室) 이옥봉’이라 적은 종이가 가장 안쪽에 있었다고 한다. 온몸을 휘감은 종이는 이옥봉의 시 365수가 적힌 것이었고... 이런 스토리를 남긴 것은 명나라 사신으로 떠났던 조원의 아들이라고 풍설로 전해온다. 하지만, 그녀의 시 32편이 수록된 <옥봉집(玉峰集)>이 <가림세고(嘉林世稿)>의 부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가림세고(嘉林世稿)>의 편자가 조원의 손자다.


이처럼 사랑하는 이로부터 버림을 받은 옥봉의 시들은 거의 대부분이 사모와 원망이 뒤섞여 있다. 그중 술에 의지한다는 내용으로 보아 마지막 편으로 추정되는 작품 <閨情(규정)>은 이렇다.


平生離恨成身病(평생이한성신병) 평생 이별의 한이 몸의 병 되어

酒不能療藥不治(주불능료약불치) 술도 달래지 못하고 약으로 고칠 수도 없네

衾裏泣如氷下水(금리읍여빙하수) 얼음 밑 흐르는 물처럼 이불 속에서 눈물 흘리니

日夜長流人不知(일야장류인부지) 밤낮을 울어도 사람들은 모르리


이 옥봉의 가묘도 파주에 있다. 용미리 혜음원지 방문자 센터에서 왼쪽으로 건너편 쪽에 조성돼 있는 임천 조씨(林川趙氏) 묘역 안에 있다. 거기엔 2017년 4월에 새로 조성된 깔끔한 묘비 하나가 눈에 띄는데 그곳에 적혀 있는 사연이 애틋하기 짝이 없다. 그 묘비의 뒷면에 적힌 비석 조성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옥봉 가묘와 비석>


...이름은 이숙원(李淑媛) 호는 옥봉(玉峯)으로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이다. 선조 때 옥천군수를 역임한 이봉의 딸이며 운강공(雲江公) 조원(趙瑗)의 측실이다. 우리 가문에 현존하는 <가림세고>(嘉林世稿) 부록에 옥봉의 시 32수가 수록되어 전해오고 있으며 현세에도 절창으로 평가받고 있는 시인이다. 운강공과 옥봉의 만남도 예사롭지 않지만 별리의 과정이 애처롭고 생몰연대 역시 불분명하여 죽음의 과정 또한 알 길이 없다. 다만 중국의 어느 바닷가에 시편(詩篇)을 몸에 감은 시신이 떠다녔다는 이야기만이 설화처럼 전해져 오고 있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에 우리 후손들은 옥봉할머님을 추모하고자 운강묘 아래 이 비를 세운다...


참고로 조선의 3대 여류 문인으로는 황진이, 허난설헌, 매창이 꼽힌다. 그중 부안의 기생 매창은 이매창으로도 불리고, 그녀를 기린 공원까지도 부안에 있는데 파주에도 이매창이 있다. 바로 이율곡의 누나 이매창이다. 율곡 집안의 이매창 묘는 위에 언급한 이이 가족묘역 중 우측에 있다.


[취재] 파주 알리미 최종희

*본 기사는 시민기자분이 직접 취재 후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