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음원지는 국가가 지정한 '사적'이다

파주의 소중한 자산 하나가 늘었다. 지난 11월 12일 국가문화재 혜음원지(惠蔭院趾. 파주시 광탄면 용미4리 134-1번지 일원)의 본격적인 활용을 위해 건립한 혜음원지 방문자센터가 개관했다. 2001년부터 10차에 걸쳐 오랫동안 진행해 온 발굴 조사를 마치고 이제는 제대로 손님맞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2022.11.15. KBS 뉴스에서 매우 상세히 보도할 정도로, 이 센터 개관이 갖는 의미는 작지 않다.

혜음원지(惠蔭院趾)는 혜음원 유적지를 뜻한다. 혜음원은 서울과 개성을 오가는 관료들을 위해 고려 예종 17년(1122)에 건립된 국립 숙박시설로서 이른바 국립호텔 격인데 당시로서는 특급호텔 수준이었다. <동문선(東文選)>에 실린 김부식의 「혜음사신창기(惠陰寺新創記)」에는 혜음원의 창건 배경과 과정, 운영 주체, 왕실과의 관계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국왕의 행차에 대비하여 행궁도 축조돼 전체 면적이 111,597㎡(약 3만4천 평)이나 된다.

KBS 보도화면

혜음원지 전경

혜음원지는 사적(史蹟)이다. 국가문화재 사적 464호다. 사적(史蹟)이란 ‘문화재보호법’ 제2조의 규정에 따라 역사적·학술적·관상적·예술적 가치가 큰 것으로서, 국가가 법으로 지정한 문화재를 말한다. 아래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혜음원지는 국가 문화재인 사적으로 지정될 만큼 역사적 가치가 큰 소중한 유적이다.


파주에는 천연기념물 2건, 보물 1건을 포함하여 17개의 국가 문화재가 있는데 그중 사적이 14개로 가장 많다. 사적 중에서는 덕진산성(537호), 이이유적(525호) 등이 최근 지정된 편에 든다. 국가 사적 지정(2011.07.28) 고시에 따라 예전의 ‘파주용미리혜음원지’의 공식 명칭이 ‘파주 혜음원지’로 변경되었다.

역, 관, 원이 무엇?

혜음원(惠蔭院)은 고려시대에 건설된 원(院) 중 대표 격으로 그 규모와 내역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원(院)은 고려 ~ 조선시대에 도보나 말(馬) 등을 이용하여 관료들이 먼 길을 갈 때 국가에서 제공하던 휴게 및 숙식 시설로 역.관.원 중 최상위급이다. 단순 휴식과 말의 교체 기능을 수행하는 역(驛)의 기능을 보완하여 숙식을 제공하는 관(館)과 원(院)이 설치됐고, 그에 따라 서민들의 주막도 들어섰다. 조선시대에는 이를 보강하여 30리마다 역(驛)을 두었고, 지역별로 10여 개의 역을 한데 묶어 종육품 찰방(察訪)이 관리했다.


현재 지명으로 남아 있는 사리원이나 조치원은 그러한 원지(院地)에서 나온 이름이고, 벽제와 홍제동은 본래 있었던 벽제원과 홍제원에서 ‘원’자가 떨어져 나간 지명들이다.


혜음원지(惠蔭院趾)는 여러 가지로 귀중한 의미를 갖는다. 고려 ~ 조선시대에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되었던 혜음령이라는 명칭의 유래에서 그 위치가 추정되어 오다가 1999년 주민(대학생)의 제보에 의해 시작된 조사에서 ‘惠蔭院’이라고 새겨진 암막새가 수습됨에 따라 현재의 위치를 확인하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전문가들이 참여한 발굴 조사가 10차에 걸쳐 이뤄졌다(발굴단장: 서영일 한백문화재연구원장).

혜음원지임을 확인해 준 암막새

혜음원지임을 확인해 준 암막새

혜음원의 개략적인 시설 배치도

혜음원지의 개략적인 시설 배치도

조사 결과, 동서 약 104m, 남북 약 106m에 걸쳐 9개의 단(段)으로 이루어진 경사지에 37개의 건물지를 비롯하여 연못지, 배수로 등의 유구(遺構. 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와 금동여래상, 기와류, 자기류, 토기류 등의 많은 유물이 나왔다. 혜음원지는 문헌과 유구, 유물을 통해 원(院)의 구조와 형태, 운영 실태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왕실, 귀족, 평민 등 각 계층의 생활 양식도 전해 주는 유적으로서 고려 전기 건축 및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떠올랐다. 이 유물과 자료들을 이번에 개장된 방문자센터의 전시실에서 모두 볼 수 있다.

이 혜음원지는 특히 건축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 현재 우리에겐 몇몇 고려시대 건축지들이 있다. 팔만대장경을 제작 보관했던 강화의 선원사터, 삼별초 항쟁지였던 진도의 용장산성 궁궐터, 고려 법상종의 최대 사찰인 원주의 법천사터 등이다. 하지만, 별궁과 원의 규모를 함께 상세히 알려주는 유적지로는 혜음원지가 유일하다.


또한 혜음원지는 고려시대 특유의 경사지 건축의 실체를 잘 보여준다. 중국이나 일본, 그리고 조선조에서는 대체로 평지에 건축을 했다. 남북 중심축을 설정하고 그 위에 주요 건물들을 세우고, 좌우 대칭으로 부속 공간들을 만들었다. 우리의 경복궁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고려시대의 대형 건축물들은 자연을 활용하여 경사지에 세워졌다. 기단(基壇)을 조성하고, 배수로를 배치하여 자연과의 유기적 입체적 조화를 꾀했다. 그 형태가 조선조에 이어진 것은 현재의 창덕궁이 유일한데(일본인들이 함부로 작명한 ‘비원’이 그 창덕궁의 후원이다), 창덕궁의 그러한 특징적 가치가 인정되어 유네스코 문화재로도 등재된 것이다.


파주는 예나 지금이나 북으로 가는 길의 필수 경유지

임란 때 선조는 허겁지겁 북으로 피란길에 올랐다. 이른바 의주 파천이다. 당시의 한양-의주 길은 아래에서 보듯 현재의 행로와는 조금 달랐다. 서울 홍제와 경기 벽제를 거쳐 혜음령을 넘고, 임진강을 건너 파주 동파리에서 장단길로 접어드는 길이었다. 현재 문산을 품고 있는 파주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북으로 가는 길의 필수 경유지다. 분단국의 접경 도시로서 평화도시를 지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의주로 가는 길의 과거(파란색)와 현재(연두색)

의주로 가는 길의 과거(파란색)와 현재(연두색)

임금이 난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는 것을 몽진(蒙塵)이라고도 하는데, 몽진은 먼지(塵)를 뒤집어쓴다(蒙)는 뜻이다. 선조의 의주행은 몽진 이상이었다. 유성룡의 임진란 체험 반성기인 <징비록(懲毖錄)>에 의하면 혜음령을 넘을 땐 백성들이 길가로 나와 울부짖으며 도망가는 군주을 욕했고, 동파리에서는 불을 피울 나무조차 없어서 역관 건물을 뜯어 추위를 피했다. 선조를 마중 나온 장단부사가 간신히 끼니를 마련했는데 그걸 군사들이 훔쳐 먹기도 했다. 현재 동파리에는 선조가 묵었다는 역관의 유적이 남아 있다.


그런 점에서 선조가 임진강을 넘을 때 마땅한 배 한 척이 없어서 주변의 백성들이 널문(板門)을 뜯어다 급조한 뗏목 덕분에 도강했고, 그 뒤로 널문리가 한자 표기에 따라 판문리(板門里)가 되었다는 설화는 신빙성이 적다. 더구나 그 널문리 지명과 도강 지역은 멀리 떨어져 있다.(이와 관련한 내용은 이곳 <시민기자가 간다> 기사에 이미 실린 바 있다.(https://www.paju.go.kr/news/user/BD_newsView.do?q_ctgCd=1002&newsSeq=585)


그처럼 혜음령은 역사적으로는 한양으로 통하는 주요 길목으로 교통의 요지였다. 사람과 물산의 왕래가 빈번하여 언제나 붐볐다. 김부식의 <혜음사신창기(惠陰寺新創記)>에 의하면, 골짜기가 깊고 수목이 울창하여 호랑이와 도적들이 때때로 행인들을 해치기가 일쑤여서 1년에 수백 명씩 피해자가 나왔다. 이에 고려 예종이 개경(개성)과 남경(서울)을 왕래하는 일반인과 관료들을 보호하고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예종16년 2월에 착공하여 두 해 뒤에 완공한 것이 혜음원이다. 처음에는 혜음사를 짓고 혜음원은 부속 시설이었는데, 뒤에 왕비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크게 되었다.


절을 사찰(寺刹) 또는 사원(寺院)이라고도 하는데, 사찰은 절집이란 뜻이고 사원(寺+院)은 절과 원의 합성어로서 이런 원(院)의 숙식 제공 기능이 덧대져 이뤄진 말이다. 고려시대의 원들은 그 운영을 대부분 절에 위탁했다.

혜음원지 방문자센터 개관의 의의

이와 같이 혜음원이 지니고 있는 소중한 가치와 의미를 방문객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건립된 것이 혜음원지 방문자센터다. 건축 면적 약 800㎡ 지상 2층의 규모로, 전시실, 영상실, 교육실, 사무실, 편의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방문자 센터

방문자 센터

전시 유물 설명서

전시 유물 설명서

이에 따라 앞으로는 방문객들이 더 이상 혜음원 유적지를 눈길로만 훑고서 떠나는 아쉬움이 줄어들게 되었다. 혜음원의 조성 배경, 발굴 과정, 출토 유물, 한양-의주길에서의 혜음원 기능 등 혜음원의 상세 내역을 전시물을 통해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앞으로 한양-의주길 답사 여행 등을 IT기법으로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준비되고 있다고 한다. 관련 사항은 방문자센터(☎ 031-940-5836)에 문의하면 된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다. 그 알맹이는 현장에서 더 많이 눈에 띈다. 유물이나 유적지를 허투루 대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 취재 : 파주알리미 최종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