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성산(174m)은 ‘테뫼식 산성’으로 둘러싸여 있다. 고구려 시대에는 칠중성(七重城 ; 사적 제437호), 신라 시대에는 중성(重城), 고려초에는 적성(積城)으로 불렸던 이곳은 예부터 국경지대의 요충지였다. 성곽의 자취는 무너져 내려 원형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전략의 요충지라는 지리적인 입지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개성~연천 장남면~파주 적성면~의정부~서울로 연결되는 지름길에 가로놓인 게 감악산(674m)이고, 험준한 벼랑을 가르며 장장 8km나 이어지는 게 설마리계곡이라면, 입구를 틀어막고 있는 병마개와도 같은 존재가 중성산이기 때문이다.

중성산주변 지도

중성산 주변 지형이 잘 나타나 있는 지도

중성산 정상은 적성면 구읍리의 적성향교에서부터 20분이면 족히 오를 수 있다. 나지막한 야산이라고 만만하게 보기 쉽지만, 정상에 서는 순간 탁 트이는 전망에 놀라게 된다. 동쪽으로는 물비늘 반짝이며 굽이쳐 오는 임진강 상류부터 소요산까지 한눈에 들어오고, 동남으로는 감악산 정상의 전망탑이, 남으로는 비학산 줄기가, 남서로는 파평산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다. 서쪽에서는 개성의 송악산과 군장산이, 북쪽에서는 고랑포, 호로고루성, 주월리의 육계토성이 우르르 달려온다.
높은 산들은 강물을 성급하게 떠다밀고, 허망하게 밀리기 싫은 강물들은 버팅기면서, 적성 부근의 임진강은 유난히도 몸을 뒤틀어댔다. 함경남도 마식령산맥에서 발원한 강줄기가 연천군 중면 삼곶리에 이르러 장군탄(將軍灘)이 되고, 군남면 남계리 한탄강 합류지점에서 도감포(都監浦), 미산면 동이리 썩은소 부근에서 후연강(朽淵江), 백학면 구미리에서 구연강(龜淵江), 백학면 학곡리에서 신지강(神智江), 백학면 노곡리 사미천 합류지점에서 술탄(戌灘), 장남면 고랑포리에서 호로탄(瓠盧灘)을 이루었다. 여러 여울이 첩첩이 겹쳐 흐른다고 하여 칠중하(七重河)로 불리게 되었고, 칠중성은 고구려 칠중현의 치소(治所)가 되었다.

여울마다에는 굽이굽이 애틋한 전설이 깃들었다. 공민왕이 산언덕에 정자를 짓고 뱃놀이를 즐겼다는 주월리(舟月里 : 한배미 마을), 공양왕이 고려왕들의 신주를 가지고 도망치다가 빠뜨렸기에 구연(仇淵)이 되었다는 구연강, 그 사건을 추모하기 위해 연천군 미산면 구미리에 세웠다는 숭의전(崇義殿), 우왕(모니노)의 생모임을 주장하던 반야가 수장을 당했다는 신지강.

수심이 얕은 주월리의 가여울

수심이 얕은 주월리의 가여울

걸어서도 건널 수 있는 가여울

걸어서도 건널 수 있는 가여울

예전엔 배를 타지 않으면 임진강을 건너기 어려웠다. 적성 지역에는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얕은 여울목 두 곳이 있었다. 장좌리의 고랑포와 주월리의 가여울. 그곳들은 오랜 세월 두고두고 전략의 요충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면, 중성산에 칠중성이 자리 잡게 된 뿌리는 가여울이다. 개도 건널 수 있다는 의미의 술탄(戌灘)이 ‘개여울’이 되었다가 ‘가여울’이 됐을 뿐, 세월이 흘렀어도 근본은 달라지지 않았다. 사람이 걸어서 건널 수 있다는 말은, 적의 침투가 쉽다는 뜻 아니겠는가.

가여울 앞에는 백제의 육계토성(六溪土城)이 있다. 임진강이 구불구불 흘러 북쪽으로 튀어나와 활처럼 굽은 평지에 쌓은, 둘레 약 1,700m의 토성이다. 여섯 개의 개울을 아우른다는 ‘육계’의 의미야 어찌 되었든, 가여울과 두지나루를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를 잡은 것만은 틀림이 없다. 2007년 10월 22일 경기도기념물 제217호로 지정되었다.

1996년 7월 임진강 유역의 큰 홍수로 긴급 조사가 시작됐으며, 그 뒤로도 간헐적인 발굴이 이뤄졌고, 요즘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다. 성벽 기단부의 화강암과 현무암 석재, 백제시대의 주거지, 온돌시설, 각종 토기와 철기, 장신구 등이 출토되었다. 그중에는 고구려 유물도 섞여 있으므로, 고구려에서 남하하던 고이왕계의 백제가 잠시 머물렀던 하북위례성이 아니겠느냐는 추론이 제시되기도 했으나 입증되지는 않았다.

육계토성 일부

육계토성 일부

육계토성 발굴 사업 안내

육계토성 발굴 사업 안내

칠중성을 육계토성의 배후성으로 꼽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평소에는 육계토성에서 농경에 종사하다가 유사시에는 칠중성으로 들어가 농성하는 방식은, 낯설지 않은 그 시절의 방어 전략인 것이다.

칠중하는 이미 온조왕 때부터 전투지로 기록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왕 18년 겨울 10월, 말갈이 습격해 왔다.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하에서 그들과 싸웠다. 추장 소모를 생포하여 마한에 보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생매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칠중성 지역에서는 신라와 고구려뿐만 아니라 신라와 당나라가 대결을 벌이기도 했다. 특히 『삼국사기』 문무왕조와 열전에는 칠중성에 대한 기사가 가장 많이 나타나는데, 문무왕 2년(662)과 문무왕 8년(668)의 싸움은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 이후 시기의 문무왕과 무왕 11년, 13년, 15년의 기록은 당나라와 싸운 기록이다.

칠중성 정상에 있는 안내판

칠중성 정상에 있는 안내판

칠중성 성곽 흔적

칠중성 성곽 흔적

현대에 들어와서도 전략의 요충지로서 칠중성의 중요성은 줄어들지 않았다. 6.25 한국전쟁 때, 설마리전투 직전까지의 전황은 가팔랐다. 북한군 남침(1950. 6. 25) → 서울 함락 → 국군 낙동강전선 후퇴 → 유엔군 인천상륙(9. 15) → 서울 수복(9. 28) → 국군 38선 돌파(10. 1) → 압록강 진격 → 중공군 개입(10. 25) → 흥남 철수 → 서울 재함락(1951. 1. 4) → 서울 재수복(3. 15) → 중공군 총공세 설마리전투(4. 22~25).

중공군사령관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에게 5월 1일 메이데이 선물로 서울을 바치기로 작정했고, 단숨에 점령할 셈으로 63군 휘하 3개 사단을 전격 투입했다. 영국군 글로스터셔여단의 글로스터대대는 칠중성에서 감악산으로 이어지는 설마리계곡을 봉쇄했다. 글로스터셔여단은, 영국 글로스터셔주에서 참전한 29보병여단이고, 글로스터대대는 글로스터시에서 참전한 29보병여단의 제1대대였다. A중대는 칠중성에, 대대본부는 235고지에 자리를 잡았다. 미군들은 군사지도의 칠중성에 캐슬고지라는 진한 글자를 덧씌웠다.

칠중성에서 바라본 육계토성

칠중성에서 바라본 육계토성

1951년 4월 22일 한밤중. 중공군은 가여울을 건너 곧장 칠중성으로 달려들었다. 예광탄이 강변과 들판을 대낮처럼 밝혔고, 우박처럼 쏟아져 내리는 크고 작은 포탄들이 땅거죽을 파 뒤집었다. 중공군은 파편처럼 튀어 오르거나 채석장의 낙석처럼 떨어져 내렸다. 온 세상의 포탄들이 날아와 벌판을 불바다로 만들었건만, 중공군은 멈출 줄 모르고 개미 떼처럼 꼬물거리며 이리저리 내달았다.

글로스터대대는 4월 24일 감악산 계곡에서 포위되었고, 고립무원의 결사항전 끝에 전멸했다. 대대원 652명 가운데 전사 59명, 포로 526명, 생환자는 단 67명. 하지만 전투의 성과는 대단했다. 그들이 사투를 벌인 4월 22일부터 25일까지의 4일간은 6.25전쟁의 분수령이 되었다. 유엔군은 서울을 방어할 소중한 시간을 벌었고, 중공군의 서울 재점령 작전은 실패했다. 중성산의 설마리계곡 병마개 역할이 성공을 거둔 결과였다.

* 취재 : 강병석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