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근교의 풍광은 매력적이었다. 낮게 물결치듯 누운 작은 산들, 그 뒤로 보이는 높은 산들 그리고 그 높은 산 중의 하나인 삼각산, 사방이 논밭이고 녹야(綠野)이며 숲과 사람들이 공들여 보존하고 있는 거목들이 있었다. 우리는 암벽 사이의 좁은 길로 들어섰는데, 양쪽 암벽은 하늘을 찌를 듯 수직으로 자란 나무들로 뒤덮여 있었다. 이 협로는, 이 나라의 모든 길이 그러하듯, 오로지 자연이 저 혼자 관리하는 공도(公道)였다.
한낮이 되어 우리는 서울에서 40리쯤 떨어진 작은 마을인 고양에 도착하였다. 관장이 나를 보러 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주민 모두가 관아를 에워쌌다. 오후에 우리는 4리를 더 가서 파주에서 보교(옛날 사람이 타던 가마 종류)를 멈추었고 거기서 유숙하기로 하였다.
(중략)
우리는 파주에 도착해서 활쏘기 훈련을 하고 있는 아전들을 만났다. 그들이 모두 나를 보러 와서는 어찌나 할 얘기도 많고 묻는 것도 많은지, 우리는 아주 늦게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다음 날 나보고 씻으라고 화강석으로 된 대야에 물을 담아 주었는데, 그 돌그릇은 화병 모양으로 속이 옴폭하였고 아래쪽에는 사용한 물을 흘려보내도록 구멍 하나가 나 있었다. 한 사람씩 차례로 대야 앞으로 오면 그 옆에 물 한 동이가 있고, 대야 가장자리에는 입안과 치아를 닦아낼 소금이 작은 접시에 가득 담겨 있었으니, 조선인들은 매일 이것을 빠뜨리지 않고 하였다.
아침식사는 꽤 푸짐하게 나왔다. (중략) 관청의 식단을 보면, 일반적으로 밥 한 사발과 그 옆에 국 한 그릇이 놓이고 작은 반찬 그릇들이 여러 개 올라와 있는데, 계란, 쇠고기, 돼지고기, 나물들, 배추김치 혹은 무김치, 고추장 그리고 무엇으로 조리를 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밖의 여러 반찬들로 항상 푸짐하게 잘 짜여 있었다.
이날 나는 두 개의 거대한 석상을 보고 감탄하였다. 그 두 석상은 산허리에 수직으로 솟아나 있는 바위에 몸체를 새겨 조각한 것이었다. [그 석상을 조각한 예술가가 꽤 솜씨가 좋았는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보면 석상들이 꽤 생동감 있고 균형 있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굵은 윤곽으로 조각한 하나는 옛 조선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다른 석상 역시 거대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좀 동그스름한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의 말로는 그것이 어느 양반의 아내라고 한다.]
사람들은 이 두 입상을 파주미륵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곧 파주 지역에 있는 쌍석불상이라는 뜻이다. 이 두 석불입상의 조성은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유럽에서는 언제나 이 반도국을 꼬레라고 칭하는데, 꼬레라는 이름이 바로 고려 왕조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는 곧 임진요새에 도착하였다. 높은 언덕 위에 세워진 요새는 요새의 이름을 딴 임진강이 흘러가는 것을 굽어보고 있었다. 높고 견고하게 쌓아 올린 성채가 서울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대형 정크도 지나갈 수 있을 이 강을 우리는 나룻배를 타고 건넜다. 강 건너편에는 작은 마을이 있었고, 그 마을에서 나는 거인 장한을 보았다. 그는 돗자리 위에 앉아서 미동도 하지 않고, 심지어 고개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무섭게 보이려고 눈알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긴 쇠촉을 단 철창이, 그것도 마치 배의 돛대만큼이나 큰 철창이 놓여 있었으니 그를 보며 골리앗이 생각났다. 그 장한의 임무는 길목을 감시하고 임진 통로를 방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