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사진 - 프랑스 선교사의 19세기 조선 체험기 '나의 서울 감옥 생활 1878'

프랑스 선교사의 19세기 조선 체험기 '나의 서울 감옥 생활 1878'


『나의 서울 감옥 생활 1878』은 파리외방선교회 소속 펠릭스 클레르 리델(1830~1884) 주교가 1878년 1월 28일 서울에서 체포, 투옥되었다가 같은 해 6월 10일 석방될 때까지 약 5개월에 걸쳐 체험한 감옥생활 수기다. 리델 주교의 회고록을 아드리앵 로네 신부가 편집·정리하고 해설을 붙여 간행본을 펴냈고, 이를 기본으로 하되 간행본에 빠졌던 회고록의 일부를 되살려 우리말로 옮겼다.

리델은 조선에서 포교 활동을 하던 중 1866년 병인박해 때 중국으로 피신했다가, 톈진의 프랑스 극동함대에 조선의 천주교 박해 사실을 알렸다. 사령관 로즈 제독은 함대를 이끌고 가 강화도를 점령한 뒤, 프랑스 신부 9명에 대한 사죄를 요구하다가 철수했다. 이 사건이 역사에 기록된 병인양요다. 그 후 중국에 머물던 리델은 조선교구 6대 교구장에 임명되어 1877년 다시 조선에 잠입, 포교활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었다. 리델은 죽음을 각오하고 순교하기를 원했으나 중국의 요청에 따라 조선 땅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조선 땅에서 체포되었으면서도 사형당하지 않은 첫 번째 선교사가 되었으며, 만주에 머무는 동안 최초의 한국어 문법서인 『한어문전』과 『한불자전』을 출간하는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리델은 석방과 동시에 중국으로 송환되었다. 한양에서 출발한 호송행렬은 의주옛길(무악재~고양~혜음령~용미리마애이불입상~임진나루~개성~평양~의주)을 지나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 봉황성에 이르렀다. 그 14일간의 여정을 수수하고 꾸밈없는 필치로 꼼꼼하게 기록한 수기가 『나의 서울 감옥 생활 1878』이다. 조선시대의 감옥 생활과 풍습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글이 경이로울 뿐 아니라, 특히 파주 땅의 정경 묘사가 인상적이다.

용미리 마애이불입상(광탄면)

책에 언급된 용미리 마애이불입상(광탄면)


서울 근교의 풍광은 매력적이었다. 낮게 물결치듯 누운 작은 산들, 그 뒤로 보이는 높은 산들 그리고 그 높은 산 중의 하나인 삼각산, 사방이 논밭이고 녹야(綠野)이며 숲과 사람들이 공들여 보존하고 있는 거목들이 있었다. 우리는 암벽 사이의 좁은 길로 들어섰는데, 양쪽 암벽은 하늘을 찌를 듯 수직으로 자란 나무들로 뒤덮여 있었다. 이 협로는, 이 나라의 모든 길이 그러하듯, 오로지 자연이 저 혼자 관리하는 공도(公道)였다.

한낮이 되어 우리는 서울에서 40리쯤 떨어진 작은 마을인 고양에 도착하였다. 관장이 나를 보러 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주민 모두가 관아를 에워쌌다. 오후에 우리는 4리를 더 가서 파주에서 보교(옛날 사람이 타던 가마 종류)를 멈추었고 거기서 유숙하기로 하였다.
(중략)
우리는 파주에 도착해서 활쏘기 훈련을 하고 있는 아전들을 만났다. 그들이 모두 나를 보러 와서는 어찌나 할 얘기도 많고 묻는 것도 많은지, 우리는 아주 늦게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다음 날 나보고 씻으라고 화강석으로 된 대야에 물을 담아 주었는데, 그 돌그릇은 화병 모양으로 속이 옴폭하였고 아래쪽에는 사용한 물을 흘려보내도록 구멍 하나가 나 있었다. 한 사람씩 차례로 대야 앞으로 오면 그 옆에 물 한 동이가 있고, 대야 가장자리에는 입안과 치아를 닦아낼 소금이 작은 접시에 가득 담겨 있었으니, 조선인들은 매일 이것을 빠뜨리지 않고 하였다.
아침식사는 꽤 푸짐하게 나왔다. (중략) 관청의 식단을 보면, 일반적으로 밥 한 사발과 그 옆에 국 한 그릇이 놓이고 작은 반찬 그릇들이 여러 개 올라와 있는데, 계란, 쇠고기, 돼지고기, 나물들, 배추김치 혹은 무김치, 고추장 그리고 무엇으로 조리를 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밖의 여러 반찬들로 항상 푸짐하게 잘 짜여 있었다.
이날 나는 두 개의 거대한 석상을 보고 감탄하였다. 그 두 석상은 산허리에 수직으로 솟아나 있는 바위에 몸체를 새겨 조각한 것이었다. [그 석상을 조각한 예술가가 꽤 솜씨가 좋았는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보면 석상들이 꽤 생동감 있고 균형 있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굵은 윤곽으로 조각한 하나는 옛 조선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다른 석상 역시 거대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좀 동그스름한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의 말로는 그것이 어느 양반의 아내라고 한다.]
사람들은 이 두 입상을 파주미륵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곧 파주 지역에 있는 쌍석불상이라는 뜻이다. 이 두 석불입상의 조성은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유럽에서는 언제나 이 반도국을 꼬레라고 칭하는데, 꼬레라는 이름이 바로 고려 왕조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는 곧 임진요새에 도착하였다. 높은 언덕 위에 세워진 요새는 요새의 이름을 딴 임진강이 흘러가는 것을 굽어보고 있었다. 높고 견고하게 쌓아 올린 성채가 서울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대형 정크도 지나갈 수 있을 이 강을 우리는 나룻배를 타고 건넜다. 강 건너편에는 작은 마을이 있었고, 그 마을에서 나는 거인 장한을 보았다. 그는 돗자리 위에 앉아서 미동도 하지 않고, 심지어 고개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무섭게 보이려고 눈알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긴 쇠촉을 단 철창이, 그것도 마치 배의 돛대만큼이나 큰 철창이 놓여 있었으니 그를 보며 골리앗이 생각났다. 그 장한의 임무는 길목을 감시하고 임진 통로를 방위하는 것이다.

리델 주교가 쓴 감옥 생활 수기

리델 주교가 쓴 감옥 생활 수기

리델 주교가 그린 감옥 배치도

리델 주교가 그린 감옥 배치도

리델의 체험수기 『나의 서울 감옥 생활 1878』의 내용은 다채롭고 이채롭다.
감옥 안에서 죄수들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옥졸(교도관)들의 만행과 부정부패다. 죄수들에게 밤새도록 노래를 부르게 하여 잠을 못 자게 만들거나 자기가 마음에 둔 여인을 가로채기 위해 아무런 죄도 없는 사내를 잡아들여 불구자로 만들거나 이유 없이 두들겨 패서 죽은 죄수의 시체를 몰래 성문 밖에 내다버리기도 한다.
부실한 식사와 불결한 환경도 악질적이다. 주식이라고는 작은 밥사발에 아무런 간도 하지 않은 밥을 담아 아침저녁으로 먹는 게 전부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 들어올 때는 튼튼하고 건강했던 사람도 20여 일이 지나면 피골이 상접한 몰골이 된다. 그 살가죽을 또 맨바닥에 깔린 거적에서 들끓는 벼룩과 빈대가 물어뜯어서 피를 흘리게 만든다. 줄줄이 잡혀 오는 신자들을 비좁은 공간에 마구 집어넣다 보니 누울 자리조차 없는 경우도 흔하다. 심지어는 새로 잡혀 오는 신자들을 받아들일 빈자리 확보를 위해 사형 집행을 서두르기도 한다.
의복을 갈아입게 해주지 않는 것도 고통스럽다. 죄수들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거의 벌거벗고 있다. 어떤 이들은 벌거숭이 상태이며 바깥출입을 해야 할 때면 다 썩은 헝겊 조각을 마치 허리띠처럼 둘러 엉덩이만 가리고 나간다. 어떤 죄수들은 겨울에도 여름처럼 알몸으로 지낸다. 그나마 조금 남아있는 옷을 걸치고 있던 사람들도 물이 없어 빨아 입지 못한다.
감옥도 사람 사는 세상이라서 사건도 다양하다. 비밀 정보를 염탐하기 위해 걸인 행색을 하고 옥간에 눌러 있는 포도청 소속 비밀경찰, 목매러 가자는 옥졸의 부름에 밥숟가락을 놓고 옥졸을 따라가는 어느 사형수, 새로 온 죄수가 거쳐야 하는 입방 절차, 석방되어 나가는 죄수가 남아 있는 이들의 석방을 기원하며 베푸는 잔치, 사형 집행의 방법 등등. 

책의 갈피와 행간마다 감옥생활뿐 아니라 감옥을 통해 조선 사회 전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단서들이 가득하기에 풍물지로서도 손색이 없다.



[책 정보]
- 도서명 : 나의 서울 감옥 생활 1878
- 저자 : 펠릭스 클레르 리델 / 유소연 역
- 출판사 : 살림(2008.12.30)
- 규격  : 양장본 252쪽 
※ 파주시 도서관 대출 가능

* 취재 : 강병석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