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교포 2세로 태어난 서경식은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49인의 초상>(돌베개)에서 김구, 김산(장지락), 윤동주 등의 삶을 통해 디아스포라로 살았던, 또는 살아가는 이들의 굵직한 메시지와 고뇌를 들려준다. 그러면서 “오늘날 드러나고 있는 혼미와 일탈 역시도 ‘인격’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사람이 경험하고 극복해 갈 수밖에 없는 고통에 찬 자기 분열 과정”으로 본다.
여기 파주에서 디아스포라적 존재로 살아가는 또 한 사람을 소개한다. 동지를 하루 앞둔 12월 21일 오전 문산 당동리에 있는 아파트 내 도서관에서 ‘파주시 사할린 영주귀국자협회’ 박승의 회장(80)을 만났다. 그를 만나 어디서 태어나, 어떻게 지냈고, 파주에 정착하게 된 사연, 협회에 관해 얘기를 들었다.

그는 스스로 선택해서가 아니라 조국의 운명과 자신이 태어난 환경에 의해 국적이 여섯 번이나 바꿨다. 일제강점기이던 1942년에 사할린에서 태어나 1945년까지는 일본 국민으로, 1945년에 끝난 2차 대전 후에는 무국적자로, 1958년에는 북한 공민으로, 1970년대에는 소련 국적자로, 1990년 소련 붕괴 후에는 러시아 연방 국민으로, 2010년에 영주 귀국하여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그런 속내를 풀어낸 역사 에세이 <박승의 나는 누구입니까>(구름바다)를 쓰기도 했다.

2007년 첫 저서인 ‘기초 한자’ 교과서를 기념하고 있는 박승의 사할린 영주귀국자협회장

2007년 첫 저서인 ‘기초 한자’ 교과서를 기념하고 있는
박승의 사할린 영주귀국자협회장

1984년 어머니 강순예 여사의 회갑 잔치에서 찍은 가족 사진

1984년 어머니 강순예 여사의 회갑 잔치에서 찍은 가족 사진

미니 인터뷰

Q. 어떻게 사할린에서 태어났고, 어떤 생활을 했나요?
전라북도 무주에서 1915년 태어난 아버지는 일제의 강제 모집으로 러시아 사할린 남부 가라후토 벌목장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이후 이주해 온 어머니를 만나 저희 형제를 낳았어요. 부모님은 ‘나는 못 배웠지만, 내 자식들은 꼭 공부시켜서 대학을 보내겠다’는 생각이 컸어요. 아버지는 목재업을 해서, 어머니는 텃밭에서 재배한 오이, 토마토 등을 시장에서 팔아 8남매를 공부시켰지요. 특히 어머니는 밤낮없이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저는 모스크바종합대학교 물리학과에 진학하려고 했으나 입학 허가서가 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사할린에 있는 유즈노사할린스크 국립사범대학교 물리수학과에서 공부했지요. 졸업 후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그만두게 되었어요. 이후 TV, 라디오 등을 수리하는 기술자로 일했어요.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한국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 한국어 학원이 많이 생겼어요. 그때 친구 권유로 한국어 강사 생활도 했어요.
1992년에 어머니와 한국 방문을 했는데, 연세대학교 한국어 어학당을 찾아 더 배우기로 했어요. 6개월간 한국어를 공부했지요. 제 나이 오십 때입니다. 공부를 마치고 사할린에 돌아가 국립대학교 한국어과 교수가 되어 18년 동안 한국어, 한국문화, 한국 역사를 가르쳤지요.

1993년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 졸업식에서 수료증을 받는 모습

1993년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 졸업식에서 수료증을 받는 모습

1996년 사할린대학교 경제 및 동양학대학에서 졸업생들과 기념 사진

1996년 사할린대학교 경제 및 동양학대학에서 졸업생들과 기념 사진

Q.  어떻게 영주 귀국을 하게 되었고,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계시나요?
사할린에 강제 이주로 오게 된 후손들이 꾸준히 일본 측에 “우리 조국은 한국이다. 한국으로 보내 달라”고 요구했죠. 그 결과 일본 적십자사와 한국 적십자사가 논의, 1994년부터 영주 귀국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아내와 2009년에 몇 개 후보 도시 중 파주 문산 당동리로 왔어요. 2011년까지는 대학 수업을 위해 왔다 갔다 했지요. 영주 귀국 후에는 매년 사할린에 있는 아들 삼형제와 손주들을 보러 가고 있어요.

1969년 신혼이었던 박승의, 김소자 부부 기념사진

1969년 신혼이었던 박승의, 김소자 부부 기념사진

2018년 사할린 주 한인협회 관리와 담화하는 모습

2018년 사할린 주 한인협회 관리와 담화하는 모습

현재 전국적으로 사할린 영주 귀국자 협회가 몇 개 있다. 박 회장이 운영하는 사할린 영주귀국자협회 회원은 40여 명이다. 사할린에서 의사, 교수, 교사, 공무원 등을 한 분들이 많다. 남성 회원은 10여 명이고 대부분 여성 회원이다. 평균 연령은 78세 정도다. 예전에는 자원봉사단을 꾸려 거리 청소하기, 교통정리 등을 하기도 했으나 이제는 나이가 들어 힘든 상황이라고 한다. 게다가 코로나19 발병으로 인해 회원들간의 친목 나들이도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집안에서만 지내고 있다.

박 회장은 “생활은 정부 지원금으로 부족하지 않게 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투표를 하는 등 권리와 의무도 행사하고 있다. 이방인으로 느껴지지 않게 현지인과 똑같이 대해주면 좋겠다. 파주시문산종합사회복지관에서 운영하는 무료급식소가 있는데, 이용 인원이 한정돼 있어 사할린에 갔다 오면 부재기간동안 대기자에게 이용권이 넘어가버린다. 다시 이용하려면 대기자로 이름을 올리는 수밖에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해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 “사할린 교포들은 해외생활을 오래했기 때문에 한국말이 서툴기도 하다. 표현을 잘 못하더라도 이해해 주면 좋겠다. 고향이라고 왔는데, 고향이 아님을 느끼기도 한다. 한국에 와서도 한국 사람이 아닌 한국 사람이다”라며 아쉬워했다.

시민들이 그의 당부와 고민에 귀 기울여, 동토의 땅 사할린에서 고국을 찾은 이들이 따뜻한 연말과 새해를 맞이하길 바라본다.

*취재 : 최순자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