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에는 두 왕릉(삼릉과 장릉) 외에도 역사책에 등장하는 유명인사들의 묘가 적지 않다. 고려시대의 학자 겸 명장이자 파평 윤씨의 중시조인 윤관(광탄면 분수리. 사적 제323호)을 필두로, 조선조의 대표적 명재상인 방촌 황희(탄현면 금승리. 경기도 기념물 제34호), 대학자 이율곡(자운서원. 법원읍 동문리. 사적 제525호) 등이 잇따르고, 같은 문중에서 피비린내 나는 대윤/소윤 대치 사건을 치른 파평 윤씨 들도 파주에서 영면 중이다. 그리고 얼마전 독지가의 오랜 끈질긴 노력 덕택에, 조선조의 대표 명의 허준의 묘(진동면 하포리 산129, 경기도 기념물 제128호) 도 뒤늦게 발견된 바 있다. 

사연 많은 여인들의 묘도 있다. 자매가 연속하여 추존 왕비의 반열에 올랐지만 모두 20세를 전후하여 안타깝게 요절한 한명회의 두 딸을 비롯하여, 기생 출신으로서 정실 처첩도 아님에도 후손들이 양반 사대부가의 묘지에 정식으로 모신 최초의 사례인 홍랑. 관비 출신의 생모 휘하에서 자라나 종1품 정경부인으로까지 올라 문정왕후의 비호를 배경으로 남편인 윤원형보다 더 실세를 자랑하다 폐서인이 되어 사극의 단골이 된 정난정. 그리고 5분만 더 버텼더라면 출산했을 산모가 안타깝게도 절명하여 최초로 모자의 미라가 공개되었던 이름 미상의 파평 윤씨 여성 등이 그들이다. [이 여인들의 묘에 대해서는 이곳 <시민기자가 간다> 코너에서 ‘파주에 묻힌 여인들의 기구한 사연’(2021.1.13.)으로 상세히 다룬 바 있다.]

현대인 중에도 눈에 띄는 이들이 있다. 금년 3월호 <파주소식>에서 다뤘던 한글학자 겸 독립운동가로 조선어학회 사건의 발단을 제공했던 정태진(금릉), 그리고 현대 국어학계의 태두 격인 이숭녕(조리읍)도 파주에서 영면 중이다. 그 밖에 명품 잡지 <사상계>의 발행인으로 박정희 시대의 대표적 반정부 활동가였던 장준하 선생,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 한국의 고교생 중 8할 이상이 그의 책으로 공부했다는 <정통 성문 영어>의 저자이면서 자신이 모은 국보 4점과 보물 22건을 기증하여 아름답게 마지막을 장식한 송성문(2011년 별세)도 파주에 잠들어 있다.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에 대해서는 이 <시민기자가 간다>에서 지난 5월 20일 자로 살펴본 바가 있다.

이번 기사에서는 이효석을 다루면서, 기일 즈음에 돌아보겠다고 약조했던 장준하 선생(1918~1975)을 살펴보고자 한다. 8월 17일이 바로 그의 46주기 기일이다.

장준하의 영원한 쉼터, <장준하공원>

오두산 통일전망대 입구에서 우측으로 조금만 가면 <장준하공원>이 있다(탄현면 성동리 688, 현충시설 등록번호 15-1-33). 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소공원으로, 그의 특이한 묘소가 있는데 바로 ‘돌베개’ 모양이다. 이 ‘돌베개’는 그가 학도병으로 끌려가 임정요인들과 함께 귀국하기까지의 2년간(1944~1945)의 기록을 담은 책자의 제목인데, 젊은 시절의 그가 그린 광복의 꿈을 대체할 젊은 저항 정신을 북돋기 위해서 1971년 5월에 펴냈다. 그 ‘돌베개’는 훗날 그의 정신을 흠모한 이해찬의 출판사 이름으로(1978 창업) 되살아나고, 노무현의 돌베개 묘로도 이어지고 있다. 그의 정신은 그만치 연면(連綿)한데, 2018년 <장준하공원>이 현충시설로 지정된 연유이기도 하다.

선생의 돌베개 묘

선생의 돌베개 묘.

노무현의 돌베개 묘

노무현의 돌베개 묘. 돌베개 출판사를 세운 이해찬은 총리로서는 젊은 편인 52세에 노무현정부의 국무총리로 발탁되었다(2004.6.~2006.3.)

이 묘가 처음부터 현재의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목사였던 부친 밑에서 자란 탓에 훗날에야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한 터여서 사후에 그는 광탄면의 나사렛천주교묘지에 안장되었는데, 그 뒤 묘지 주변의 축대들이 홍수 사태로 피해를 입게 되었다. 그것을 안타까이 여긴 파주시가 앞장서서 장소를 물색하고 장준하기념사업회(이하 ‘기념사업회’로 약칭)와 논의를 거쳐 2012년에 공원을 조성하여 이장한 곳이 현재의 장소다.

선생은 평북 의주 출신으로 파주와는 무연고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가 오늘날에도 파주에서 높이 기려지고 있는 것은 그의 민족애와 민주주의 사랑으로 요약되는 싱싱한 ‘젊은’ 정신 때문이다. 해마다 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치러지는 추모제에는 파주시장과 국회의원, 도.시의원과 사업회 회원, 유족 등 200여 명이 참석하는데, 올해에는 코로나 사태로 가로막혔다.

선생은 ‘혈기 넘치는 독립 운동가(미 특수부대 OSS 대원), 명품 잡지 출판인, 옥중 당선한 국회의원 겸 민주화운동가, 반유신 핵심 인사, 행동하는 저항 정신의 표상’으로 불리는가 하면, ‘최악의 반유신 위해분자'(당시의 중앙정보부 기록)라는 표현도 있다. 그만치 정치, 언론, 사회운동의 다방면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무엇보다도 그는 대표적인 행동파 지성인이었다.

영원히 기억될 명품 잡지 <사상계>의 발행인 

그가 남긴 수많은 발자취 중 대표적인 한 가지로 <사상계> 발행이 있다. 이 잡지의 모체는 피란 시절이던 1952년 8월 문교부 산하의 국민사상연구원에서 <사상>이라는 이름으로 발간한 잡지였다. 하지만 몇 달이 못 되어 발간비 문제로 폐간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당시 편집인으로 참여하고 있던 선생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이듬해 4월에 인수하여 살려냈다. 기관지였음에도 그 내용이 너무나 유익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창간호 1000부를 찍어 그걸 리어카에 싣고 선생 부부는 피란지 부산 서점들을 돌았는데, 그 평판이 놀라웠다. 전쟁 통이었음에도 2쇄까지 찍었다. 그리고 그러한 인기는 훗날 10만 부를 찍는 일로 이어졌다. 요즘 월간지 중 1만 부를 찍는 곳도 없는 것을 떠올리면 그 당시의 관심과 인기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사상계 창간호

사상계 창간호

사상계 사장 시절의 선생. 출처: 오픈아카이브

사상계 사장 시절의 선생. 출처: 오픈아카이브

<사상계>가 그런 명품 잡지로 떠오른 것은 국민 의식의 고취를 목적으로 한 자유민주주의와 정치 발전, 민족 자존심, 경제 발전... 등의 종합적인 내용이 너무나 빼어나서였다. 그리고 그 받침대는 출판기획 회의였다. 3달마다 열리는 그 회의에는 당대의 유명 학자와 종교인, 지성파 정치가...등이 망라되었고, 그중 학자들에게는 한 달 봉급과 맞먹는 교통비가 지급되었다. 한마디로, <사상계>에 글을 싣지 못하는 이는 당대의 지성인 축에 들지를 못했다. 그런 명품 잡지가 박정희의 장기 집권 야욕이 꿈틀거리던 1970년에 강제 폐간당한다. 그해 5월 김지하의 <오적>을 게재하자 일차 판금되고, 9월에는 등록 취소로 이어져서다.

'재야 대통령' 으로까지 불리던 선생은 박정희 시절 내내 으뜸 골칫거리이자 눈엣가시였다. 철권 통치 시절 누구도 꿈꾸지 못했던 일들을 그냥 해냈다.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을 써내고, 정치자금용이던 사카린 밀수 사건 때는 박 대통령을 ‘밀수 왕초’라고 직격했다. 그런 그에게 국가원수모독죄가 적용될 것은 뻔했다. 긴급조치 1호~2호가 그를 잡아넣기 위해 공표될 정도여서, 공포 당일 즉시 최초로 수감되기도 했다. 징역 15년을 때려도 미국 정부가 조용히 나서서 병보석으로 그를 살려냈다. 온갖 죄목으로 감옥을 드나든 그가 의문사한 것은 개헌을 위한 100만인 서명 운동을 DJ와 상의 후 거사일을 잡은 뒤 며칠 만의 일이었다. 당시 그의 매일 행적은 중앙정보부에 의해 시간대별로 ‘위해분자 행적 관찰 일지’에 기록되고 있었다.

장준하의 뻔한 의문사는 영원한 숙제다?! 

선생의 죽음은 1975년 8월 17일, 포천군 이동면 도평리 소재 운악산 약사봉에서의 돌연한 추락사로 발표/처리되었다. 그 소식에는 숱한 의문부호가 붙었고, 두 번의 진상조사단(1차 민주당. 2차 대통령 직속 의문사위)이 꾸려졌지만, 명시적 결론은 확증 부족으로 아직도 미궁이다.
하지만, 아래의 몇 가지 사례만으로도 그 답은 이제 누구라도 추정할 수 있다.

- 선생의 추락 지점은 경사 75도 높이 12미터나 되는 깎아지른 벼랑이었다. 그날 현장에 나갔던 동아일보의 의정부 주재 기자(장봉진)는 기자수첩에 “추락사인데도 전신에 골절상이 하나도 없음”이라고 썼다. 또 인근 주민들은 취재 기자에게 사고 지점을 가리키며 “불과 보름 전에야 군사보호 지역에서 해제된 곳”으로 원래 등반 코스가 아니라고 했다. 그런 내용을 담은 기사가 나가자 검찰은 동아일보 의정부 지방부장, 장 기자, 성낙오 편집부 기자를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 그날 일행들과 떨어져 그곳으로 오른 건 선생과 김용환 둘뿐이었다. 김용환은 선생의 국회의원 입후보 시절 자원봉사자로 참여하여 몇 달을 함께 일한 뒤 사라졌다가 산행 직전일에 홀연히 합류한 의문의 인물인데, 추락사 직후에 목격자 진술을 할 때 김용환은 선생의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다. 아울러 선생의 소지품인 안경과 보온병이 깨지지 않은 채 시체 옆에 온전히 보존돼 있었다.

- 현장에서 시신을 육안 검시한 의정부 외과의사 심구복이 적시한 기록 중엔 이런 것도 있었다: “직접적인 사망은 오른쪽 귀 뒤쪽에 있는 급소가 예리한 흉기에 찔린 듯한 6cm 가량의 후두부 함몰에 기인”하며, “오른쪽 팔굽 안쪽에 작은 찰과상, 그리고 오른쪽 엉덩이 부분에 큰 찰과상을 입었을 뿐”이고 “그의 의복은 찢어진 것도 없었고 더렵혀지지도 않았”으며 “예리하게 모가 난 바위에 75kg 무게의 몸이 떨어졌을 때 생겨야 하는 상처가 없었다.” 선생의 의문사를 오래 추적한 뒤 이 기록을 고스란히 보도한 홍콩의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 서울 특파원 로이 황 기자는 그해 10월 3일 중앙정보부에 의해 국외추방되었다.

- 2012년 8월 17일, 선생 사망 37주기 기일을 앞두고 새로 조성된 묘역으로 이장하기 위해 묘를 파헤쳐 관을 연 순간, 모두들 깜짝 놀랐다. 선생의 두개골에 마치 둥그런 망치로 가격당한 것처럼 손상을 입은 부위가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선생 사망 후, 그의 시신을 최종 부검한 의사 조철구 박사는 “두개골에 직경 5~6센티미터가량의 함몰 자국이 보인다”는 검안 기록을 남긴 바 있다. 이에 대해 이정빈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법의학교실)는 “장 선생의 사인은 추락이 아니라 가격에 의한 골절의 가능성이 크다”며 누군가가 선생을 “제3의 장소에서 살해한 뒤 시신을 옮겨 온 것”이라고 추론했다.

2012년 개관 시 드러난 선생의 해골은 함몰돼 있다. 기념사업회 제공

2012년 개관 시 드러난 선생의 해골은 함몰돼 있다. 기념사업회 제공

- 2차에 걸친 의문사 진상위원회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증거(살해자와 과정)를 확보하지 못한 것은 중앙정보부와 기무사의 비협조 때문이었다. 진상조사위의 담당 팀장(고상만)에 의하면, 중정의 ‘위해분자 행적 관찰’ 팀원과 기무사의 당시 포천 관할 실무자가 각각 그 관찰 일지의 존재와 사건 당일 자신이 작성해서 보낸 A4 절반분의 긴급 텔레타이프 보고서의 존재를 언급했음에도, 중정과 기무사는 각각 ‘관련 문서를 찾지 못했음’, ‘그런 문서는 존재하지 않음’으로 답해 왔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원통함은 선생의 사고 한 달 뒤 울분에 찬 청년들이 비석 받침도 없이 사고 현장에 급히 눕혀 놓은 아래의 비석에도 잘 요약돼 있다: “<중략> 여기는 ~운동 등의 위대한 지도자 장준하 선생이 원통히 숨진 곳. 뜻을 같이하는 젊은이들이 맨손으로 돌을 고아 비를 세우니, 비록 말 못하는 돌뿌리 풀나무여! 먼 훗날 반드시 돌베개의 뜻을 옳게 증언하라”

약사봉 사고 현장에 석부도 없이 눕혀 놓은 비석. 출처: 오픈아카이브

약사봉 사고 현장에 석부도 없이 눕혀 놓은 비석. 출처: 오픈아카이브

‘영원히 젊은 저항 정신의 표상’은 지금도 이어져온다: ‘반칙/특권 없는 사회’

선생이 독재 정권하에서 꿈꿨던 것은 오직 하나다. 무법이 횡행하는 불법 특권이 없는, 공정하고 공평한 사회였다. 그것이 ‘반칙 없는 사회, 특권 없는 사회’로 요약되어 노무현의 취임사에 담겼다. 그리고 지금은 거기에 공정과 정의가 보태지고 있다.

선생의 모든 외침을 ‘시대를 관통하는 젊은 정신’이라 해도 좋은 이유다. 늙지 않는 정신은 사회를 젊고 밝게 만든다. 그런 그를 우리 파주가 안고 있는 건, 자랑거리다. 그의 정신을 잊지 않고 더욱 키워나가는 것으로 보답해야 하지 않을까.

선생의 그 젊은 정신 일부는 지금도 <장준하공원>에서 친필로 우릴 맞고 있다. 선생의 글씨는 풍모에 어울리게 올곧고 단호하게 힘차다. 글씨에서 빠지지 않았던 DJ조차도 한때 그의 라이벌로 여겨지기도 했던 선생의 글씨체를 흠모했다고 전해진다. 두 선각자의 글씨를 선물 삼아 아래에 보인다.

선생의 자필
 DJ가 전태일 분신 때 추모 연설을 하기 위해 준비했던 자필 초고

사진 : (좌) 선생의 자필. 내용은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를 이룩하기 위하여, 자손만대에 누를 끼치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지성(至誠)일관 용왕매진하자’. 이에 대한 김수환 추기경의 답사 겸 다짐도 장준하공원에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그의 죽음은 별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보다 새로운 빛이 되어 우리의 앞길을 밝혀주기 위해 잠시 숨은 것일 뿐입니다.”   (우) DJ가 전태일 분신 때 추모 연설을 하기 위해 준비했던 자필 초고. 출처: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 [파주가 품고 있는 저명인 묘(1)] #메밀꽃 필 무렵#이 파주로 이사한 사연  바로가기


* 취재 : 최종희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