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황금 종을 찾아내려는 고전 영화 <골든 벨>과 <전함 바이킹>(원제: The Long Ships. 1963)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황금 종은 산꼭대기에 엎어져 묻혀 있었거나, 그냥 지나치곤 하던 낡은 사원의 돔에 있었다. 흙을 조금 걷어내거나 표면을 쪼아내자 그 모습을 드러낼 정도로 얕게.
서부영화 중 하나에서는 강도로부터 금괴를 지키기 위해 금괴들을 은행 출입구의 계단석으로 쓴다. 계단석 먼지를 떨어내자 그 모습이 드러난다. 강도들은 그 계단을 밟고 오르내렸음에도 그것이 금괴였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처럼 소중하고 진귀한 것들이 의외로 가까운 주변에 있을 때가 흔하다. 눈에 들어오지 않거나 보아도 그냥 지나쳤을 뿐이다. 파주에도 그처럼 덜 주목해 온 진귀한 것들이 있다. 1편에 이어 그런 진품 몇 가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영화 <닥터 지바고> 속의 명물 발랄라이카가 파주에도 있다

영화 <닥터 지바고>는 러시아의 대표적 민속 악기인 발랄라이카로 시작해서 발랄라이카로 끝난다. 도입부에서는 지바고의 이복형이 지바고와 라라 사이의 소생인 조카딸을 만나는데, 삼촌과 헤어지면서 그녀가 등에 메고 가는 악기가 보인다. 그게 발랄라이카다.

지바고가 8살 때 모친이 숨지면서 그에게 물려준 단 하나의 유산이 바로 그 발랄라이카였다. 영화 주제곡으로 유명한 <라라의 테마>에서 트레몰로 주법으로 깔리는 음악에서 유난히 빛나는 악기도 발랄라이카다. 거리를 걸어가는 라라를 전차 안에서 본 지바고가 차를 내려 황급히 그녀 뒤를 쫓아가다가 심장마비로 쓰러져 죽을 때 깔리는 음악 역시 발랄라이카가 주역이다.

영화 속에 나오는 발랄라이카는 정확하자면 가장 널리 쓰이는 프리마 발랄라이카다. 발랄라이카는 현이 내는 소리의 음 높이에 따라 대체로 6가지로 나뉘는데(피콜로에서 베이스까지), 크기가 커질수록 음 높이가 낮아진다. 가장 큰 건 거의 오케스트라의 콘트라베이스 크기이고 음색도 비슷하여 콘트라베이스 역할을 한다.

영화 속의 발랄라이카는 사진에 보이듯 최고급형이다. 통 겉면이 자개와 보석으로 장식돼 있다. 지바고의 모친이 그에게 소중하게 간직하라면서 물려줄 만하다. 파주의 세계민속악기박물관(031-946-9838)에 보관돼 있는 것은 그보다는 아래인 중상급 보급형이다. 그럼에도 박물관 소개 화면에서 류트계 악기들과 더불어 맨 처음에 나온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 나오는 발랄라이카

영화 <닥터 지바고>에 나오는 발랄라이카

세계민속악기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발랄라이카. (사진 속의 손은 기자의 손)

세계민속악기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발랄라이카. (사진 속의 손은 기자의 손)

참고로, 2003년에 문을 연 세계민속악기박물관은 헤이리 방문자라면 꼭 들러야 할 명소의 하나로, 그 이름처럼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여러 나라의 민속 악기들을 구비하고 있는 파주의 자랑스러운 자산이다. 각국의 민속 음악 연주법을 실제로 배울 수 있도록 많은 강좌도 열고 있다. 코로나 사태로 임시 휴관이었는데 올 1월 19일부터 재개관했다. 고급품 발랄라이카 실물들(3개)은 세계다문화박물관에서 볼 수 있으며, 헤이리에도 일반 보급형 하나가 수장고에 더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장례식에 쓰였던 차도 파주에 있다

언젠가 퀴즈 프로그램에 이런 문제가 나왔다. ‘다음 중 한국에 기념관이 있는 인물은? : 모차르트·베토벤·아인슈타인·엘비스 프레슬리.’ 답은 엘비스 프레슬리(1935~1977)다. 엘비스 이후의 모든 대중음악은 엘비스 음악의 변형과 발전으로 보는 이도 있다. 그런 엘비스 음악에 심취한 이종진 관장이 사재를 털어 2000년에 개관한 <엘비스 기념관>(파주시 광탄면 보광로 920번길 30. 031-948-3358)이 바로 그곳이다.

그곳의 소장품 중에서는 엘비스와 관련된 차량 6대, 그의 생전에 발매된 LP판 72매가 소중한 것들에 든다. 엘비스도 무명 시절에는 제임스 본드 역의 숀 코네리처럼 트럭 운전수를 했다. 그때 그가 몬 것이 시보레 31 아파치인데, 1959년에 보급되기 시작한 차량이다. 동형의 모델 앞에서 이 관장이 사진을 자주 찍는다. LP판 중에는 방송국에도 없어서 유명 DJ 김광한이 찾아와 빌려간 것도 있다.

차량 중 진귀한 것, 곧 진품(珍品)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장례식 때 쓰인 엘도라도 캐딜락이다. 장례식 때 영구차 1대와 8대의 리무진, 7대의 캐딜락이 동원되었는데, 그 캐딜락 중 한 대가 사진 속의 차다. 호주로 팔려 나간 것을 이 관장이 어렵게 재구매해 온 것이라고 한다. 차량이 흰색인 것은 엘비스가 워낙 흰색을 좋아해서인데 장례식에 동원된 모든 차량이 흰색이었던 일은 그가 유일했다. 거의 대부분이 정해 놓은 듯 장중한 색깔인 검은색을 쓴다.

비스 기념관에 있는 엘도라도 캐딜락. (출처: 파주시)

비스 기념관에 있는 엘도라도 캐딜락. (출처: 파주시)

군 생활 중의 엘비스. 명찰을 보면 가명이 적혀 있다.

군 생활 중의 엘비스. 명찰을 보면 가명이 적혀 있다.

무대에서의 시끄럽고 야한 모습을 보면 대표적인 ‘딴따라 날라리’일 것만 같은 엘비스는 술, 담배도 안 했다. 월남전이 터지자 입대를 기피하거나 반전 운동에 뛰어들기도 한 히피들과는 달리 그는 자원 조기 입대를 했다.

육해공군에서 다투어 그를 모셔가고자 여러 가지 특별 조건들을 내걸었지만, 그는 모두 거절하고 독일의 기갑여단에서 평범한 소총수로 근무했다. 그의 근무지로 뒤따라간 여자들이 여럿이었을 정도여서, 엘비스는 아래 사진에서 보듯 명찰에 본명(Elvis Aaron Presley) 대신 가명을 달고 다녔다. 그의 장례식에 온통 흰색뿐인 차량과 흰색의 꽃들을 많이 사용한 것은 그의 순수 본성이 아껴온 하얀색을 마지막까지 지켜주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엘비스는 갔어도, 놀랄 정도로 순결했던 엘비스의 생각들은 그런 흰색 사랑에 담긴 실물로 남아 우리를 일깨운다. 그는 모친 생일 선물로 자신의 노래를 선물하려고 당시로서는 거금이었던 4달러를 내고 녹음한 지극한 효자였고, 그다음 해에 지역 방송국에서 그의 노래가 나가자 방송국에 문의 전화와 엽서가 폭주했다.

‘평범한 젊은이’임을 강조하고 특별대우를 마다하면서 입대한 그는 육군 문서에 이런 평을 남겼다: "엘비스를 우러르는 많은 청소년은 훗날 군 생활에서도 그의 본을 따를 것"이라고. 사고로 죽을 뻔했던 밥 딜런이 ‘엘비스를 보러 갈 뻔했다’고 말했을 정도로, 가수들 사이에서도 엘비스가 특별대우를 받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그런 그를 존중하여 장례식에도 흰색 차량만 썼고, 그 차 하나가 파주에 머물고 있다. 순백색의 장례용 차를 우리가 어디서 또 대할 수나 있을까.

6.25정전회담 협정문 작성에 쓰인 한글 타자기, 그 국산 원조 현품이 파주에 있다

2년이나 걸려서 6.25정전협정을 타결하고 작성한 협정문은 영문본, 한글본과 중국어본이 있었다. 한글본은 당연히 한글로 타자되었다. 그러면 의문이 생긴다. 전쟁이 한창 때인 1953년에 한글 타자기가 있었을까 하는. 답은 ‘있었다’이다. 공병우 박사가 발명한 한글타자기가 그 주인공이다.

6.25정전협정문 서명 부분(영한). 협정문 원본은 영어, 중국어, 한국어의 3종으로 작성되었고 한글본 원본은 현재 북한이 보관 중이다.

6.25정전협정문 서명 부분(영한). 협정문 원본은 영어, 중국어, 한국어의 3종으로 작성되었고 한글본 원본은 현재 북한이 보관 중이다.

“나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말고, 장례식도 치르지 말라. 쓸 만한 장기는 모두 기증하고 남은 시신도 해부용으로 기증하라. 죽어서 땅 한 평을 차지하느니 차라리 그 자리에서 콩을 심는 게 낫다. 유산은 맹인 복지를 위해 써라.”

이러한 유언을 남기고 실제로 의과대학의 해부 실습 재료가 된 의학박사이자 한글학회 이사장(1959~1977). 1999년 특허청이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가 7인(세종대왕, 장영실, 이순신, 정약용, 지석영, 우장춘과 함께)’ 중 하나로 선정한 인물... 그가 최초로 안과 전문 병원을 개설하여 평생토록 의사/한글학자/발명가라는 1인3역을 한 치의 빈틈도 없이 해낸 공병우 박사다.

공 박사를 이 위대한 발명가 7인에 들게 한 것은 한글타자기인데, 이 한글타자기가 6.25정전 협정문 작성에서도 암암리에 크게 한몫을 해냈다. 당시 미군은 전쟁 통에 더욱 비참하게 피폐해진 한국민을 대하고는 가난하고 미개한 동양 민족의 하나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협정문 작성 과정에서 한글이라는 고유한 문자를 가지고 있고, 그걸 타자할 수 있는 타자기까지 있다는 걸 알고는 크게 놀랐다’고 미군 전사[6.25정전회담 약사]에 남길 정도의 성가를 그 타자기 하나가 해냈다.

공 박사의 한글타자기 개발사는 길다.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는 일 처리에서의 한글 타자기가 꼭 필요하다고 여겨 그 개발에 매달린 끝에 첫 시제품 3대가 미국의 언더우드 사에서 만들어진 건 1950년. 그 뒤 극소량이 들어와 쓰이다가 본격적으로 국내에 유입되기 시작한 것이 1953년이었다[그중 두 대가 현재 국가지정문화재 552-1과 552-2로 지정돼 있다]. 회담 당시 미군 측의 통역을 맡고 있던 언더우드 씨가 공 박사에게 한글타자기를 요청하여 제공한 게 바로 그 협정문 작성에 쓰였다.

공 박사는 이후로도 한글타자기 제작 및 보급을 계속했는데,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 타자기를 생산할 만한 시설이나 기술이 없어서 미국의 영문타자기를 들여다 자판과 글쇠를 한글로 바꾸고 글쇠판 조작 방식 일부를 바꾸는 편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것을 100% 국산화에 성공한 게 1970년이다. 그 첫 상표가 유니온이었다. 말하자면 세벌식 한글타자기의 첫 순수 국산품으로, 정전협정문에 쓰인 공병우 타자기의 적장자인 셈이다. 그 유니온 시제품 타자기가 파주에 있다. 두루뫼박물관(법원읍 초리골길 278. 031 958-6101/2)에서 소장 중이다. 보급형은 한글박물관에서 소장 중인데, 이처럼 타자기 하나를 소중히 하는 것은 공 박사의 혼이 담겨 있는 제품이라서가 아닐까.

공병우타자기 유니온 시제품. 두루뫼박물관 소장

공병우타자기 유니온 시제품. 두루뫼박물관 소장

공병우타자기 유니온 보급형. 한글박물관 소장

공병우타자기 유니온 보급형. 한글박물관 소장

파주는 6.25정전회담과 이모저모로 관련돼 있다. 3번에 걸쳐 옮겨진 회담장의 최종 주소지가 '파주시 진서면 통일로 3303'인데 67년 만에야 찾았다고 2020년 말에 화제거리로 뉴스화되기도 했다. 협정 당사자의 하나로 서명권자였던 유엔군사령관 클라크 대장이 서명한 곳은 판문점이 아니라 문산읍 소재의 문산극장에서였다. 서명 때 사용한 탁자에 대해서는 1편에서 다룬 바 있다. 판문점의 옛 명칭 널문리도 고대로부터 파주 소속이었고, 임진란 때 의주 파천을 치른 선조가 백성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임금님의 밥(수라)까지 군졸들에게 빼앗긴 곳도 파주 였다. [이 판문점과 6.25정전회담의 재미있는 앞뒤 이야기는 차후에 상세히 다뤄진다.

다음 편에서는 그동안 파주의 4대 명물로 꼽혀온 황복/참게/장단콩/개성인삼에 대한 과거와 현재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히 살펴보는 것으로 <파주의 진품 명품>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부터 행복하게 해주세요. 그러면 멀리 있던 사람들도 당신을 찾아올 것입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마법의 순간》 중 한 구절이다. 그처럼 행복은 가까운 곳에 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있다. 때때로 우리는 이 사실을 깜박깜박 잊기 때문에 행복의 먼 길을 찾아 헤맨다. 여기서 ‘행복’을 ‘답(지혜)’으로 바꿔도 된다. 답은 언제나 가까이에 있다. 우리 주변엔 진품이나 진인/귀인들이 적지 않다. 조금만 더 관심해서 찾아보면 어디에고 늘 있다.

* 취재 : 최종희 시민기자(jonycho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