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가 배출한 걸출한 조선시대의 인물로 단연 두 사람이 꼽힌다. 율곡과 황희 정승. 이 두 사람에게는 역대급 기록 보유자라는 공통점도 있다. 시쳇말로 하자면 한국판 기네스북 기록감들이다.

황희는 영의정 18년, 우의정 1년, 좌의정 5년을 합쳐서 총 24년을 정승의 자리에 있었다. 조선조 최장 기록인데, 게다가 90살까지 살았다. 평균 수명이 50살 미만이어서 60살만 돼도 회갑 잔치를 벌이며 장수를 축하하던 시절에. 조선조의 역대 고관 중 황희보다도 더 오래 산 사람은 기록상 7명 정도가 꼽힐 정도로 희귀한 사례이기도 하지만, 죽기 3년 전까지 붙들고 놓아주지 않은 채 일을 맡겼다고 해서, 후대의 일부 사가들에게 세종의 혹사 의혹까지 입길에 오르기도 했던 인물이다.

이율곡의 이름 앞에는 늘 ‘9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아홉 번(九度)이나 장원을 한 분(公)이란 말이다. 이때의 장원은 과거 시험을 뜻한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그런 기록 보유자는 율곡 한 사람뿐이다.

8세부시(八世賦詩). 율곡이 8세에 화석정에 올라 지었다는 천재적인 작품

8세부시(八世賦詩). 율곡이 8세에 화석정에 올라 지었다는 천재적인 작품

여기서 이런 의문이 솟는다. ‘과거 시험은 한 번만 보면 될 텐데, 어째서 9번씩이나 봤을꼬? 실력 자랑을 하고 싶어서?...’ 그 까닭을 살펴보려면 당시의 과거 제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수다. 그리고 답부터 말하자면 29살 때 한꺼번에 단계적으로 치른 6단계 모두를 수석으로 합격했고[=장원급제], 13세 ~ 23세 시절에 치른 3번의 하급 시험에서 장원을 했는데, 그걸 모두 합쳐서 ‘9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하게 되었다. 실력 과시 삼아 같은 시험을 9번이나 치른 것은 결코 아니었다.

과거 제도 요약판

고려 광종조부터 시행돼 온 과거(科擧)는 그 명칭과 세부 내역이 시대에 따라서 자주 바뀌었지만, 큰 틀은 유지되었다. 그중 무과와 잡과를 빼고 문관 부분만을 편의상 나누자면, 소과/대과/전시(殿試)로서 각각 1차~3차 시험쯤이 되고, 소과[생진시]/대과[문과]는 초시와 복시로 나뉘었다. 즉, 생원과/진사과[선택] 초시 → 생원과/진사과 복시 → 대과 초시 → 대과 복시 → 문과 전시의 5단계를 거쳐야 고급 관료가 될 수 있었다.

소과에는 시험 내용에 따라 생원과/진사과가 있었는데, 요즘 식으로 하자면 교과서 내용 시험이 생원과이고 글짓기와 논술시험이 진사과라 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이 소과 합격자들을 각각 ‘생원’과 ‘진사’라 했고, 합격증으로 백패(白牌)를 주었다. ‘허 생원’이나 ‘최 진사’와 같은 예우 호칭은 거기서 유래했는데, 이 소과 합격자들에게만 성균관 입학과 대과 응시 자격을 주었다. 하급직으로 진출할 수도 있었는데, 소과는 참가자가 많아서 서울과 지방에서 실시했다.

2차 시험인 대과[문과]가 중요했다. 현대의 행정/사법 고시쯤이라 할 수 있는데, 대과에도 초시와 복시가 있었고, 복시 합격자 33인만 대궐에 들어가 시험을 쳐서 순위를 겨루었다. 합격/불합격과는 무관했지만, 최종 1~3위에게만 실제의 관직이 주어졌고, 33인 모두에게 합격증인 홍패와 상징물인 어사화(御賜花. 임금이 내리는 꽃이라는 뜻으로 종이로 만든 조화)를 주었다.

율곡의 9도장원공과 관련하여 이 과거 시험을 대입하면 이렇게 된다. 29세에 1차 시험인 생원과의 초시와 복시 장원. 진사과의 초시 장원. 2차 시험인 대과 초시/복시의 장원. 3차 시험인 전시에서 장원. 도합 6회의 장원 차지.

하지만 그의 과거 응시가 전부 화려한 것만은 아니다. 23세에 치러진 별시에서 초시에는 장원을 했는데, 대과에서 낙방한 적도 있다. 29세의 진사과 복시에서 합격은 했지만, 장원을 못했던 일도 있었다.

과거 급제의 실체, 그리고 실직(實職)과 산관(散官)

위에서 전시 합격 순위 1~3위에게만 실직(實職)이 주어졌다고 했다. 실제로 벼슬자리에 임용되는 것은 문과 기준 겨우 3명뿐이었다. 즉, 1등 ‘장원’에게는 종6품직을, 2~3등인 ‘방안(榜眼)’과 ‘탐화랑(探花郞)’에게는 각각 정7품을 제수했지만, 나머지는 합격증(홍패)과 어사화만 내렸다. 잔여 인원(문과 30인, 무과 25인)에게는 ​산관직(散官職. 과거 급제자로서 즉시 서용할 수 없는 사람에게 제수한 무급 산직으로 벼슬은 있되 일(職事)도 봉급도 없는 자리)을 주었다.​ 그 이유는 당시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자리 자체가 절대 부족해서였다. 문관직이라곤 통틀어 500여 직도 되지 않았다.

어사화(御賜花) 실제 착용을 그린 민화. 1미터가 넘는 것을 뒤에서 앞으로 넘기는 터라 그 끝을 끈으로 연결하여 입으로 물고 있어야 했다.

어사화(御賜花) 실제 착용을 그린 민화. 1미터가 넘는 것을 뒤에서 앞으로 넘기는 터라 그 끝을 끈으로 연결하여 입으로 물고 있어야 했다.

당시의 실직 총수로만 보자면 5,605직이었지만 거기에는 체아직(遞兒職. 현직을 떠난 문무관에게 계속하여 녹봉을 주려고 만든 벼슬)과 무록직(無祿職. 녹봉이 없는 벼슬)이 각각 3,110직과 95직이 들어 있어서 실제로 차지할 수 있는 정상직은 2,400직뿐이었다. 그중 문관직은 1,779직(경관직이 741, 외관직이 1,038)이었지만, 당시 선망되던 경관직(한양과 중앙부처 근무직)으로는 문반직 466직과 일부의 고위 무반직이었기에, 양반들은 이 500여 개 남짓한 관직을 차지하기 위하여 필사적이었고, 그것이 당파싸움 뒤에 숨겨져 있던 진짜 원인의 하나이기도 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장.차관급 116명을 위시하여 1~2급 고위공무원 1,475명, 판.검사 4,786명을 포함하여 이른바 고위직만 18000여 명에 이르는데, 그런 상황과는 천지차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전시(殿試) 장원[=최종 수석 합격자]에 주어지던 종6품을 품계로만 보자면 18품계 중 제12위라서, 의금부 도사나 종사관, 수문장 등의 직급이므로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당시의 승진 근무 연한 규정인 순자법(循資法)에 따라 참하관(정7품 이하의 문무관 잡직)인 종9품이 종6품에 오르려면 근무 성적이 빼어나도 최소 7년이 걸렸는데 그걸 단숨에 뛰어 넘어, 그것도 산관이 아닌 실직에 보임되는 일은 어마어마한 특혜에 속했다.

과거 제도와 양반 제도

장원 행진을 한 율곡과는 달리 부친 이원수는 나이 사십이 넘도록 과거(대과)에 매달렸지만 끝내 급제하지 못했다. 결국은 음서(蔭敍. 1~2품의 고위직을 역임한 조부(祖父) 덕에 대과 급제 없이 보임되는 것)로 관직에 나가 사헌부 감찰(정6품)로 마감했다. 아들보다도 훨씬 낮은 품계에 머물렀지만, 아들 덕에 사후에 좌찬성(종1품)으로 추증됐고, 신사임당도 저절로 정경부인에 올랐다.

이원수/신사임당의 묘갈(墓碣. 무덤 앞에 세우는 둥그스름한 작은 비석). 마지막 실직이 사헌부 감찰로 적혀 있다.

이원수/신사임당의 묘갈(墓碣. 무덤 앞에 세우는 둥그스름한 작은 비석). 마지막 실직이 사헌부 감찰로 적혀 있다.

그렇다면 일자리도 없어서 봉급도 안 나오고 품계만 주어지는 산관직일 뿐인 과거 급제에 어째서들 그리 목을 매다시피 했을까. 그리고 그 급제를 하면 삼일유가(三日遊街)라 하여 어사화를 꽂고 풍악을 울리며 떠들썩하게 온 동네를 3일씩이나 돌 정도로 자축 행사까지 했을까.

율곡기념관에 있는 율곡의 삼일유가 재현 인형

율곡기념관에 있는 율곡의 삼일유가 재현 인형

그건 양반 제도 때문이었다. 3대에 걸쳐 과거 급제자가 나오지 않으면 양반의 지위를 잃고 양인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과거 급제는 양반이라는 신분과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명줄이기도 했다. 그래서 시험 답안지 상단에 증조(曾祖), 조(祖), 부(父)의 이름과 관직을 반드시 적어야 했다. 다만, 공정성을 위해 채점 때는 응시자 신분이 드러나지 않도록 인적사항은 종이로 가렸다. 

소과에만 합격해도 합격증[‘백패’라 했다]이 나와서 그것으로 양반 신분 확인이 되었지만[족보 및 양반 관리 문서인 향안(鄕案)에 등재], 기왕 하는 김에 대과에까지 급제하고 싶어 그리들 매달렸다. 그것이 3년마다 온 나라의 선비들이 괴나리 봇짐을 메고 한양길로 나서게 했다.

그게 과거 제도의 진짜 얼굴이었다.

* 취재 : 최종희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