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능선에 되돌아올 때 스파이크 부대는 기관총 전동장치를 파괴하고 있었다. 그 근처에서 나는 대대장과 이야기를 끝내고 연대 의무실로 돌아오는 봅을 만났다. 통신병들은 자신들의 통신장비를 벌써 파괴했으며, 헨리는 방금 암호책자를 태우고 남은 재를 발로 밟아 비비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이동준비를 완료했다. 본부는 작은 그룹으로 나뉘어 능선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다 가고 나서 나도 능선의 정상에 올라가 반대방향으로 내려갈 채비를 했다. 봅은 가파른 경사면으로 내려가는 길옆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봅, 어서 가자.”

내가 말했다.

“우리가 아마 마지막일 것이다. 당신은 벌써 여기서 빠져 나갔어야 했다. 대대장님도 곧 떠날 것이다.”

그는 나를 잠깐 쳐다보고는 말했다.

“나는 떠날 수 없어. 나는 부상병들과 함께 남아 있겠네.”

잠시 동안 나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 철수하고 있었다. 우리들 중 일부는 성공적으로 철수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남아있겠다는 것은 포로가 되든가 아니면 중공군의 최후 공격 시에 전사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 순간 나는 그가 이 모든 가능성에 대하여 이미 다 생각해 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사숙고 끝에 그는 부상병들이 자신을 가장 필요로 할 때 그들 옆에 남아있기 위해 자기 자신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어디선가 이런 구절이 생각났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이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분명히 알았다. 나는 너무나 감동받아 그것을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그의 어깨만 툭툭 두드려주고 그 자리를 떴다.

한국인만 몰랐던 파란 아리랑/안소니 파라 호커리

[한국인만 몰랐던 파란 아리랑/안소니 파라 호커리]

호커리 장군

[호커리 장군]

6.25전쟁 때 설마리전투에서 영국군 29여단의 글로스터 대대가 중국군의 인해전술 앞에 최후까지 맞서다가 철수하는 장면이다.

『한국인만 몰랐던 파란 아리랑』(원제「대검의 칼날」; The Edge of the Sword)은 글로스터 대대의 부관 호커리 대위가 자신이 겪었던 전투와 포로생활을 생생하게 묘사한 역작이다. 영국과 유럽에서는 처음부터 독자들의 열렬한 관심을 받아왔으나, 국내에서는 뒤늦게 50년이나 지난 2003년에야 번역 소개된 책이기도 하다.

설마리전투

1951년 4월의 임진강 주변 전세는 복잡한 국제정치의 이해와 상관없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중국군은 단기간에 서울을 재점령하고자 3개 사단을 투입했으며, 그 길목인 파주 적성에 주둔했던 영국군 글로스터셔 여단은 그 공세에 정면으로 노출되었다.

중국군의 인해전술은 격렬하여 낫으로 풀을 베어 넘기듯 쓰러뜨려도 파도처럼 자꾸자꾸 밀려들었다. 결국 글로스터셔 여단 예하의 글로스터 대대는 4월 24일 감악산 계곡에서 포위되었고, 고립무원의 결사항전을 하다가 전멸하고 말았다. 대대원 652명 가운데 전사 59명, 포로 526명, 생환자는 단 67명.

하지만, 그 전투의 성과는 대단했다. 그들이 사투를 벌인 4월 22일부터 25일까지의 4일간은, 6.25전쟁의 분수령이 되었다. 그때 그곳에서 유엔군은 서울을 방어할 소중한 시간을 벌었으며, 중국군의 서울 재점령 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영국군의 희생과 헌신을 잊지 않기 위해 2014년 조성된 영국군 설마리 전투 추모공원

[영국군의 희생과 헌신을 잊지 않기 위해 2014년 조성된 영국군 설마리 전투 추모공원]

추모공원 내 추모비

[추모공원 내 추모비]

추모공원 내 글로스터 대대 동상

[추모공원 내 글로스터 대대 동상]

설마리 235고지에 세워진 추모비

[파주 영국군 설마리전투비/등록문화재 제407호/ 이 곳은 원래 금광 동굴이었는데 영국군이 설마리고지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이면서 전사자들을 임시로 안치했다고 함]

글로스터 대대의 부관이었던 호커리 대위는 마지막으로 퇴각하던 중 1951년 4월28일 포로가 되었고, 2년 4개월 뒤인 1953년 8월 31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

글로스터 대대의 부관이었던 호커리 대위는 마지막으로 퇴각하던 중 1951년 4월28일 포로가 되었고, 2년 4개월 뒤인 1953년 8월 31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

그는 1953년 7월 휴전협정 발효 뒤 영국으로 귀환하여 『한국인만 몰랐던 파란 아리랑』을 집필했다. 감악산 계곡에서 벌어졌던 4일간의 설마리전투 전모를 생생하게 묘사한 것은 물론이고, 중국군의 잔학성을 세상에 알렸다. 그 자신 일곱 차례나 탈출을 시도했다가 다시 잡혀 독방에 갇히거나 고문을 받았던 사실, 세균전을 벌였다는 허위자백을 강요받았던 미 공군 조종사의 증언, 필리핀이나 한국 병사들과 함께 겪은 갖가지 고초 등을 가감 없이 기록에 담았다.

고국으로 돌아가서도 호커리는 계속 영국군에 몸담았다. 훗날 나토(NATO)의 북유럽군 사령관(대장)을 지내고 퇴역했으며,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로스터셔 여단에서 생존한 장병들은 매년 파주 감악산 계곡의 설마리전투 추모공원을 방문

글로스터셔 여단에서 생존한 장병들은 매년 파주 감악산 계곡의 설마리전투 추모공원을 방문한다. 1999년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직접 방문하여 희생자들에게 헌화하기도 했다. 세월을 멈춰 세울 수 없는 건 어쩔 도리가 없지만, 해가 갈수록 그곳을 찾는 참전 장병들의 숫자가 줄어드는 현실은 안타깝다. 그때 그곳에서, 그들이 버틴 4일이 아니었다면 전쟁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을지도 모른다.

파주 시민들에게 『한국인만 몰랐던 파란 아리랑』 일독을 권하는 이유이다.

취재: 강병석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