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 나태주 <풀꽃1> 전문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 김춘수의 <꽃> 1~2연

국민적 애송시인 이 두 작품의 공통 출발점은 ‘자세히 보는 일’이다. 하잘것없는 작은 풀꽃들이라 할지라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자세히 보면 예쁘고, 사랑스럽고, 연인도 된다. 거기서 더 나아가 의미 있는 존재로 끌어안기 위해서는 이름을 챙겨 줘야 한다. 이름을 부르며 그 대상을 개별적으로 특화 · 특정할 때, 비로소 단순한 몸짓일 뿐이던 것이 진정한 나의 꽃이 되어 둘은 서로 잊히지 않는 존재로 격상된다. 유홍준의 말마따나 ‘아는 만큼 보이는’ 법. 모든 존재는 아는 만큼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미물이라 할지라도 의미 없는 존재는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

운정호수공원. 운정2동~3동에 걸쳐 있는 운정 신도시의 허파다. 여러 가지 멋진 시설물이 많지만 단연 으뜸은 수변 산책로다. 전체 산책로를 걸으면 좋이 8km가 넘는다. 자전거 길도 아주 잘 조성되어 있다. 야경도 멋지다, 일부러 밤에만 나오는 이들이 있을 정도로.

사방으로 뚫린 진입로와 산책로 주변에는 수십 종의 식물들이 있다. 그냥 지나치면 그저 꽃이고 나무 들일 수도 있지만, 나태주와 김춘수 시인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조금만 유심히 바라보면, 그 의미들이 달라진다. 내 것이 된다. 나아가 아는 만큼 새롭게 보인다. 그런 풀꽃과 나무 들에게 조금만이라도 알은체하는 일은 우리 삶의 지평을 넓히는 일도 된다. 부부, 부모 자식, 친구 간의 좋은 대화 소재도 되고, 그 수업료도 공짜다. 1편에 이어서, 그중 몇 가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마로니에 공원엔 마로니에가 없다: 칠엽수와 마로니에는 같은 것일까?

서울 동숭동에 있는 마로니에공원은 대중가요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과 서울 문리대 옛터라는 배경 덕분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그곳에 마로니에는 어디에 있을까? 실은 없다. 그것들은 모두 (일본)칠엽수로서 1929년 당시 경성제대의 일본인 교수가 자기네 나라 것을 갖다 심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서 마로니에라 했을까. 마로니에는 유럽 칠엽수를 이르는 프랑스어다. 아무래도 ‘칠엽수’라는 명칭보다는 뭔가 있어 보여서 ‘마로니에’로 불렀을 가능성이 짙다.

잎이 7개라서 칠엽수라는 이름이 붙었다.

잎이 7개라서 칠엽수라는 이름이 붙었다.

열매가 달린 칠엽수

열매가 달린 칠엽수

이 칠엽수는 파주시에 가로수로도 심어져 있고, 더 많이는 정원수나 조경수로 아파트 단지 내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운정호수공원 진입로에도 여기저기서 눈에 띈다. 칠엽수와 마로니에는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둘 다 잎이 7개씩 달려 있고, 자세히 보기 전에는 꽃과 꽃대 모양도 흡사하다. 하지만 열매 모양으로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다. 마로니에의 열매 바깥 면에는 사진에 보이는 바와 같이 가시 같은 돌기가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식물 표준 기관에서는 그 명칭으로 ‘가시칠엽수’를 추천하고 있다.

칠엽수 열매

칠엽수 열매

가시칠엽수(마로니에) 열매

가시칠엽수(마로니에) 열매

이 칠엽수와 가시칠엽수의 영문 표기에 말밤(horse chestnut)이라는 표기가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열매는 식용이 아니다. 일본산은 탄닌 처리를 하면 식용으로 가능하다는 설이 있지만, 마로니에는 독성이 강해서 동물 사료로만 쓰인다. 열매 껍질을 벗겨 놓으면 거의 밤과 같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마로니에가 한 그루도 없는 마로니에공원에 가서 운치(韻致)를 가불할 필요가 있을까? 꼭 마로니에를 확인하고 싶다면 올림픽공원과 서울 목동의 파리공원에 가면 볼 수 있다. 모두 88서울올림픽을 전후하여 프랑스 파리에서 들여와 심은 것들이다.

느티나무와 산벚나무: 산벚나무는 유실수다

가온초등학교 방향의 산책로 초입에서 양쪽으로 늘어선 채 조용히 산책객을 맞는 나무들이 있다. 느티나무다. 수령 500~700년을 넘긴 여러 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을 정도로 느티나무는 전통적으로 전국의 마을에서 사랑을 받아 왔다. 정자(亭子)나무(집 근처나 길가에 있는 큰 나무. 가지가 많고 잎이 무성하여 그 그늘 밑에서 사람들이 모여 놀거나 쉰다.)라 했을 만치 크고 넓은 그늘을 드리워 훌륭한 쉼터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목질부 내부의 미려한 재질은 조각용으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아 오기도 했다.

느티나뭇길

느티나뭇길

느티나무로 만든 조각품

느티나무로 만든 조각품

자전거 길과 보행로가 함께 마련된 수변로에 들어서면 벚나무들이 방문객을 반긴다. 정확한 명칭은 ‘산벚나무’다. 벚나무는 크게 겹벚꽃이 달리는 왕벚나무와 홑꽃이 달리는 산벚나무로 나누지만, 더 들어가면 꽤 복잡하다. 제주 원산으로 알려져 왔던 왕벚나무가 DNA 분석을 통해 제주왕벚나무와 일본왕벚나무의 두 가지로 확실하게 갈린 게 2014년일 정도이다. 심지어 워싱턴의 명물인 포토맥 강변의 벚나무 이름을 두고 처음에는 Japanese cherry trees라 하다가 한국의 외교관이(한표욱 전 주영 대사) 그 원산 증빙 자료들을 찾아내어 반박하자 Korean cherry trees로 바꿨는데, 나중에 일본인들의 항의로 시끄러워지자 결국은 워싱턴 시 측에서 Oriental cherry trees로 타협안을 내놓은 일도 있다.

느티나무와 산벚나무는 외형상 구분이 쉽지 않다. 잎도 서로 어긋나고, 잎 가장자리에 난 톱니 모양도 비슷하고 수피도 흡사하다. 하지만 손쉬운 구분법도 있다. 우선은 꽃이다. 느티나무도 꽃은 피지만 눈에 띄지 않는 반면, 산벚나무는 온 천하가 알게 꽃을 피운다. 두 번째로는 열매다. 산벚나무에는 버찌가 달리지만, 느티나무에는 그런 열매 대신 겨울눈이 달린다. 유심히 보면 여름철부터 겨울눈이 움터 자란다. 산벚나무는 말하자면 체리(버찌)를 맺는 유실수다. 우리가 요즘 즐겨 먹는 체리는 유럽계 버찌이고, 산벚나무는 동양계 버찌일 뿐이다.

산벚나무의 버찌가 보기에 덜 먹음직스럽다고 버릴 건 아니다. 한약재로는 전혀 쓰이지 못하는 서양 체리와 달리 말려서 약재로도 쓰고, 술을 담글 때도 버찌만 쓴다. 예전에는 ‘버찌편’이라는 음식을 만들어 산꾼이나 사냥꾼들이 비상식(非常食)으로 갖고 다녔다. 버찌편은 버찌를 체에 걸러 꿀과 녹말을 타서 뭉근한 불에 조려 굳힌 음식으로 오래도록 보관이 가능했다. 작고 단단한 것이 크고 무른 것보다는 더 야무지게 쓰일 때도 많다, 작은 고추가 더 맵듯이.

느티나무

느티나무

산벚나무

산벚나무

자세히 보면 느티나무에는 잎과 줄기 사이에 겨울눈이 있다.

자세히 보면 느티나무에는 잎과 줄기 사이에 겨울눈이 있다.

산벚나무에는 버찌가 달려 있다.

산벚나무에는 버찌가 달려 있다.

메타세쿼이아(metasequoia)의 숨겨진 비밀들

화석 나무로 현존하는 유일 종으로 잎의 숫자가 가장 많은 나무. 옆 뿌리를 수직 뿌리의 열 배 정도로 뻗는 나무. 아주 높이 자라면 물관이 끝까지 물을 올리지 못해 잎으로 안개를 빨아들여야 하는 나무. 세계에서 가장 큰 나무를 사촌 삼고 있는 나무. 그럼에도 동양이 그 원산지인 나무. 이것이 메타세쿼이아의 정체다.

세계에서 가장 큰 거수목(巨樹木)이 세쿼이아 계통이다. 여기에는 세쿼이아, 자이언트 세쿼이아, 메타세쿼이아가 있는데 메타(meta-)는 ‘~을 훨씬 뛰어넘는’이라는 뜻이다. 메타세쿼이아는 세쿼이아보다도 훨씬 이전의 것이라서 유일한 화석 나무에 든다. 중국에서 발견됐다는 것도 신선한 충격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메타세쿼이아를 수삼(水杉)으로 표기한다. 워낙 많은 물을 빨아들이는 수종이라서 그런 이름을 붙였으리라. 우리나라에는 1950년대부터 도입되어 현재는 전국적으로 퍼져 있다. 초창기에 조성된 전남 담양의 아름다운 메타세쿼이아 길이 유명세를 타자 다른 지역에서도 앞다투어 심었다고 알려져 있다.

메타세쿼이아 길

메타세쿼이아 길

메타세쿼이아는 나무 가운데 가장 많은 잎을 달고 있다. 한 그루에 수억~수십억 개의 잎이 있다. 아래 사진에서 볼 수 있듯 아주 작은 침엽들이 온 가지에 빼곡하게 달려 있다. 소나무 잎보다도 더 자디잔 잎들로, 잎의 크기로만 보자면 목본류(나무)에서는 최소급에 속한다.

메타세쿼이아의 잎들

메타세쿼이아의 잎들

잔가지에만도 200여 개의 잎이 달려 있다.

잔가지에만도 200여 개의 잎이 달려 있다.

이런 자디잔 잎들도 합심하면 큰일을 이뤄 낸다. 세계 최대의 거수목 그룹 중에서 미국의 대표적인 국립공원 관광 상품인 ‘셔먼 장군’ 나무도 그 작은 잎들이 모여 큰 성과를 이뤄 낸 성과의 실례다. 큰일을 이뤄 내려면 모름지기 작은 것에 정성을 다해야 한다. 가정이 잘되려면 식구들 각자가, 마을이 잘되려면 마을 사람들 모두가 한마음으로 뭉쳐야 하는 것과 같다. 대한민국이 잘되려면 온 국민이 하나 되어야 하는 건 두말할 나위도 없다. 편을 갈라 싸움질에 능한 사람들에게 메타세쿼이아 숲길을 걷게 하여 깨달음을 얻도록 하는 건 어떨지.

* 취재 : 최종희 시민기자(jonychoi@naver.com)